어느푸른저녁

그 짧은 순간이

시월의숲 2018. 3. 25. 21:02

급하게, 무언가에 쫓기듯 지내다가 갑자기 눈부신 햇살 아래 서 있자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다. 지독히도 길고 어두운 터널 속을 끝도 없이 지나고 있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고, 끝날 기미도 보이지 않지만, 그런 와중에도 어제와 오늘은 오롯이 나만을 위해서 시간을 할애했다. 거의 한 달 동안 계속해서 주말도 없이 일하러 나갔었기에, 갑자기 쉬려고 하니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할 일이 태산인데 이렇게 한기로이 쉬어도 되는가, 하는 압박감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아, 이건 사실이 아니다. 실은 이번 주에 고모가 왔기 때문인데, 그 핑계로 일하러 가지 않고 쉬었던 것이다. 어쨌든, 쉼없이 달리다가 갑자기 멈춰선 느낌에 어리둥절했지만, 그래서 내일 출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암울하지만, 어제와 오늘은 잠시나마 무거운 짐을 벗어놓은 느낌에 기분이 좋았다. 특히 오늘은 어제와 달리 기온이 올라가고 햇살이 눈부셨기에, 그저 산책만 해도 기분이 나아졌다. 나는 요즘 느낄 수 없었던 햇살의 따사로움을 온몸으로 느끼며 천천히 걸었다. 맛집을 찾아가 맛있는 음식을 먹었고,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을 쏟아내며 수다를 떨었고, 서류가 아니라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을 쳐다보았고, 인공호수의 비단잉어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람들. 내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지시하거나, 바라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저 풍경으로 존재하는 사람들, 나들이를 나온 가족들,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 축구를 하는 사람들,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저 풍경으로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얼마나 평화로운 일인가. 그때만큼은 저들도 누군가의 상사이자 부하이고, 아버지이자 아들이며, 동료이자 경쟁자임을 잊는다. 누군가의 무엇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존재하는 사람들로 그저 그렇게 존재한다. 내게 필요한 건 어쩌면 그런 존재감, 거리감이 아닐까.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런 존재들 말이다. 눈부신 햇살이 따사롭게 내 몸을 감쌌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스함이었다. 벤치에 앉아 있으려니 잠이 쏟아졌다.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이 시간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이 들었으나, 이 순간은 영원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하늘을 향해 팔을 들어 올렸다. 햇살의 어루만짐을 받아들이듯이. 그 짧은 순간이 나를 또 살게 한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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