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농밀한 어둠

시월의숲 2018. 4. 14. 23:15

농밀한 어둠, 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야근을 마치고 사무실을 나설 때마다 아주 짙은 어둠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곳은 시내와 30분 정도 떨어져 있었고, 조선시대 유명한 학자가 살았던 고향이어서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자리를 잡고 살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을의 젊은 사람들은 도시로 가버리고, 그곳은 농사를 짓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조그만 부락을 이루어 살고 있어서, 어떤 활기를 찾을 수는 없었다. 저녁이 되면 가로등 없는 좁은 도로는 미약한 불빛도 찾을 수 없이 완전한 어둠이 점령했다. 그 어둠은 시내에 비해 몇 배나 더 높은 농도를 지니고 있으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늘의 달과 별조차 그곳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는 짙은 어둠을 뚫고 자동차를 주차해 놓은 곳까지 걸어갔다. 정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핸드폰의 후레쉬를 켜고 바닥을 잘 살피면서 조심스레 걸어야 했다. 차를 타면 일단 안심이 되었지만(무엇으로부터의 안심인지 알 수 없지만), 그곳을 벗어나기까지 경사와 굴곡이 심하고 좁은 산길을 삼십 분 정도 나가야 했기에 미약한 긴장이나마 풀 수는 없었다. 그렇게 어둡고, 좁고, 경사진 산길을 차를 타고 돌아나오는 길이었다. 급커브를 도는데 갑자기 흰 물체가 튀어나왔다. 브레이크를 밟긴 했지만 워낙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바람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다. 하얀 털뭉치 같은 그것은 얼핏 토끼같기도 했고, 작은 고양이 같기도 했다. 흰 털뭉치가 부딪힌다. 흰 털뭉치가 날아오른다. 흰 털뭉치가 차에 부딪히는 감촉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마치 그 자신의 발에 부딪힌 것처럼. 하지만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는 어찌하지 못한다. 그는 멈추지 않는다. 아니, 멈추지 못한다. 차는 어둠 속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린다. 얼핏 그 하얀 털뭉치의 눈과 마주친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얀 털에 박혀 있는 작고 까만 눈. 튕겨져나간 그것의 생사를 확인해야 했을까? 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차를 계속 몰았다. 이러다 자신도 어둠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서. 이미 어둠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느푸른저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온전한 나만의 주말로 만드는 일  (0) 2018.04.22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라도!  (0) 2018.04.21
내가 보든 안보든 아무런 상관 없이  (0) 2018.04.08
그 짧은 순간이  (0) 2018.03.25
어떤 진부함  (0) 2018.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