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내가 보든 안보든 아무런 상관 없이

시월의숲 2018. 4. 8. 21:44



*

이때가 아니면 안되는 것이 있다. 지금이 아니면 안되거나, 지금 보지 않으면 오래도록 기다려야만 하는 것들. 꽃이 피는 것도 보지 못하고 이 봄을 보내는 것이 속상하여 자주 가던 절에 다녀왔다. 새초롬한 날씨였지만, 길가에 심겨진 벚나무에선 벚꽃이 만개했고, 나무들은 여리디여린 연둣빛 잎사귀들을 수줍게 내밀고 있었으며, 들리는 것은 새소리와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 바람소리뿐이었다. 나는 가슴을 활짝 펴고, 마치 처음 보는 것을 대하듯 그렇게 그곳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내가 안달하지 않아도 봄은 이미 와 있었고, 내가 보든 안보든 아무런 상관 없이 꽃은 피고, 여린 잎사귀들은 새초롬한 바람에 고개를 내민다. 햇살 가득한 오후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봄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너무 움츠리고만 있었던 것은 아닌지, 별거 아닌 일에 너무 의기소침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독였다. 내가 나를.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를.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를. 꽃이 진다고 너무 속상해하지 않기로 했다. 꽃은 곧 지겠지만, 또다시 나뭇가지에는 초록의 잎사귀로 가득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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