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기묘한 도시에서 책 읽기

시월의숲 2019. 1. 6. 22:34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고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술을 마신 것처럼 머릿속 어딘가가 천천히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데런의 눈은 앞을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있지 않은 상태가 되었고 다른 감각들도 조금씩 둔해지면서 온몸이 잠과는 다른 기묘한 무력과 둔감상태에 잠겼다.(권여선, 「희박한 마음」,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중에서)


*

어쩌면 그와 비슷한 상태에 빠졌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나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 있으면서 느꼈던 그 감정 말이다. 그건 분명 '잠과는 다른 기묘한 무력과 둔감상태'였다. 왜 그랬을까. 그건 자면서 꾼 꿈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에서 나는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얼마 전에 보았던 공포영화 <더 넌>에 나왔던, 악마를 깨우지 않기 위해 혹은 악마에 씌이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거라곤 주문을 외우는 일밖에 없었던 무기력한 수녀들처럼.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채 다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저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주문을 외우는 일만이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으며, 주문을 외우지 않으면 정말 악령이라도 나타나 나를 집어 삼킬 것만 같아 두려웠다. 잠에서 깨었을 때 내게 남은 거라곤 주문을 외우라는 강박과 외우지 않았을 때 벌어질 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그것은 정말 꿈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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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서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한 시였다. 어젯밤 늦게 잠을 잤으니 그리 오래 잤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부족하게 잔 건 아니었다. 기묘한 무력과 둔감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일으켜세우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냉장고에 남아 있는 음식으로 대충 허기를 채우고 집을 나섰다. 주말마다 집에만 있으니 너무 고립되는 느낌이 들어서 바깥에 나가 사람들도 구경하고 찬 공기도 좀 쐬고, 무엇보다 카페에 가서 책을 좀 읽을 생각이었다. 집에서 카페까지는 천천히 걸으면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이기 때문에 적당히 걷기에도 딱 좋을 것 같았다. 내가 사는 곳은 도청이 새로 이전한 곳으로 도시가 조성된지 얼마 안되는, 그야말로 신도시였다. 하지만 신도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람들은 이곳에 들어와 살지 않았고, 건물들은 텅텅 비었으며, 거리는 휑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활기가 없었다. 이런 곳을 일컬어 유령도시라고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짓고 있는 건물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주위의 휑한 풍경과 어울려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자아냈다. 사람들이 들어오기도 전에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는, 번성한 적도 없이 폐허가 되어버린 기묘한 도시. 그런 도시를 순례하듯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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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타난 걸까?). 히터를 세게 틀어놓았기 때문인지 대략 30분 넘게 걸어왔기 때문인지 카페 안이 생각보다 더워서 외투를 벗어야 했다. 나는 커피를 주문하고 구석진 자리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뮤지컬 '엘리자벳'을 보러 서울에 갔다가 들른 서점에서 산 책이었다.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이었는데, 한강의 최근작인 <작별>이 수상작으로 실려 있었다. 한강의 소설이 아니었다면 결코 사지 않았을 책이다. 하지만 한강의 작품 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의 작품들도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 카페에서 권여선과 김혜진, 이승우의 단편을 읽었다. 처음으로 카페에서 책을 읽는 경험을 했는데, 생각보다 잘 읽혔다. 내 뒤쪽으로 매달린 스피커에서 노래가 흘러나왔지만 책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그리 방해될 정도는 아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카페에서 왜 사람들이 책을 읽거나 스터디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카페에서 책 읽는 시간은 무척이나 빨리 갔다. 양이 많은 커피도 무리없이 다 마셨다. 어쩌면 나는 또 카페에 와서 책을 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는 커피와 책 그리고 책을 읽는 나 자신만이 오롯이 존재하므로. 그곳에서의 타인은 그저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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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도시에서 낯선 타인들 틈에 섞여 혼자 책을 읽는 것. 마치 이방인처럼. 혹은 유령도시에서 유령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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