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무라카미 하루키, 『일인칭 단수』, 문학동네, 2020.

시월의숲 2021. 4. 17. 19:44

 

그것들은 사사로운 내 인생에서 일어난 한 쌍의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와서 보면 약간 길을 돌아간 정도의 에피소드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내 인생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어느 날, 아마도 멀고 긴 통로를 지나, 내가 있는 곳을 찾아온다. 그리고 내 마음을 신기할 정도로 강하게 뒤흔든다. 숲의 나뭇잎을 휘감아 올리고, 억새밭을 한꺼번에 눕혀버리고, 집집의 문을 거세게 두드리고 지나가는 가을 끄트머리의 밤바람처럼.('사육제', 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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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기억과 관련된 여덟 가지 이야기들이 이 책에 실려있다. 여전히 하루키다운(?) 기묘한 설정들이 나오고, 우연과 우연을 둘러싼 비현실적이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위 글에서는 그것이 사사로운 인생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여덟 편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그 작은 사건은 실로 사사롭지 않은, 기억에 남을만한 커다란 사건으로 다가온다. 결과적으로 '마음을 신기할 정도로 강하게 뒤흔드는' ' 숲의 나뭇잎을 휘감아 올리고, 엇새밭을 한꺼번에 눕혀버리고, 집집의 문을 거세게 두드리고 지나가는 가을 끄트머리의 밤바람처럼' 말이다. 

 

이 책을 읽으니 하루키의 나이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글은 여전히 젊고 유니크하며 감각적이지만, 나이들어갊에 대한 자각이랄까, 뭐 그런 것들이 느껴졌다. 책 속에서도 과거의 기억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언급하는 부분이나,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한 소회 비슷한 것들을 밝히는 부분에서 특히 그랬다. 하긴 이 소설에 실린 여덟 편의 이야기 모두가 자신이 경험한 과거의 기억의 편린들에 대한 이야기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게 실제로 하루키 자신의 기억 속 이야기인지, 그렇지 않은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소설은 자서전이 아니니까.)

 

이 책에 실린 모든 소설들이 다 좋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사육제>와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이 좋았다. 늘 그렇듯, <사육제>를 읽고 나서는 슈만의 피아노곡 '사육제'를 찾아서 들었고,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을 읽고서는 사랑이라는 것에 생각하고 다시금 우울해지고 말았지만.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는 하루키의 재즈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난 재밌는 소설이었다. 재즈와 클래식에 남다른 열정을 가진 하루키가 부러웠고, 자신이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즐기면서 소설로 형상화할 수 있는 능력 또한 부러웠다. 글이란 자신이 지닌 모든 관심분야가 집약된 총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기억이라는 것을 연료삼아 만들어 낸 여덟 편의 이야기를 다 읽고 나니, 나는 미래의 하루키가 더 궁금해졌다. 하루키 자신은 그것에 대해서 별로 생각이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독자의 입장에서 무엇보다 미래의 하루키, 앞으로 나올 하루키의 소설은 어떨까 벌써부터 궁금해지는 것이다. 내 이런 마음은,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이 어쩐지 인생의 어느 한 부분을 정리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게 때로 마음에 쓸쓸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만 같아서, 나는 몇 번이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야만 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어쩌면 기억의 집합체가 되어 간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결국 과거의 기억을 안고, 그것을 연료 삼아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다면 그는 이미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것이리라. 하루키의 이번 소설집을 읽으니 그런 생각이 든다. 그건 쓸쓸할 일도, 기쁠 일도 아닌, 그저 그런 일이라는 걸 하루키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이제 집에 가야 할 시간입니다. 아쉬워도 어쩔 수 없죠.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어쩌면 하루키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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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란 때때로 내게 가장 귀중한 감정적 자산 중 하나가 되었고, 살아가기 위한 실마리가 되기도 했다. 큼직한 외투 주머니에 가만히 잠재워둔 따듯한 새끼고양이처럼.('위드 더 비틀스', 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