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토마스 베른하르트, 『옛 거장들』, 필로소픽, 2014.

시월의숲 2021. 6. 12. 17:06

 

내가 토마스 베른하르트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은 배수아 때문이었다. 배수아는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이기도 하고 독일어 문학작품을 번역하는 열렬한 번역가이기도 하다. 나는 그가 발표한 소설뿐만 아니라 그가 번역하는 작품도 꼬박꼬박 찾아서 읽곤 하는데, 그중에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라는 소설이 있었다. 나는 그 소설로 인해 토마스 베른하르트를 알게 되었고, 배수아의 작품들만큼이나 매료되었다. 소설 전체가 하나의 문장처럼 긴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는 형식과 지독하다 싶을 만큼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읽은 그 어떤 책과도 달랐다. 그것이 이 작가의 독특하면서도 일관된 스타일이라는 것을 이후에 <몰락하는 자>를 읽고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이번 독서모임에서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옛 거장들>이 선정되었을 때 내심 반가웠다. 언젠가는 읽어보리라 생각하고 있던 책이기도 했고, 이미 그의 다른 소설을 읽어본터라 그가 이번에는 또 어떤 식의 냉소와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할지 기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는 역시 그의 칼날에 살아남을 자는 없다는 것을, 그 아무리 천재적인 작가, 예술가라 할지라도 그의 독설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간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소설 또한 작가의 매력이 여실히 드러난 작품이라고 해야 할까.

 

이 소설을 읽고 느낀 것은, 그 이전 소설들에서는 미처 느끼지 못한 것이기도 한데, 그가 말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혐오하거나 비판하는 모든 대상들은, 그가 정말로 그것들을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누구보다도 깊이 사랑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것을 '애증'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애정과 증오. 그 두 감정은 상반된다기보다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붙어 있다. 즉,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지 않고서는 그렇게까지 증오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모순된 감정이 이 소설 전체의 테마처럼 보인다. 소설 속 레거는 말한다.

 

"나는 길을 내려다보고 사람들을 주시하면서,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엇인가, 저 아래 길에서 움직이는, 활동하는 저들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소위 나의 주된 일입니다. 나는 항상 전적으로 사람만 다루었습니다. 나는 단 한 번도 자연 그 자체에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내 안의 모든 것은 언제나 사람에게만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는 소위 인간에 미친 사람입니다. 오로지 사람만이 언제나 나의 관심거리였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내게 천성적으로 반감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사람에게만큼 그렇게 강렬하게 애착을 느낀 것은 달리 없었지만 그러나 동시에 사람 외에 그 무엇에도 그렇게 철저하게 거부 반응을 일으킨 적도 없습니다. 나는 사람을 증오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나의 유일한 인생의 목적입니다.(77쪽)"

 

사람을 증오하지만 동시에 사람이 유일한 인생의 목적인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며, 나아가 작가인 토마스 베른하르트인 것이다. 이 소설에서 거론되는 모든 예술가들, 음악가, 미술가, 소설가 심지어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그가 관심을 가지는 모든 것들은 오로지 예술가인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예술작품들이며, 오로지 그것만이 그의 비판 대상이 된다. 인간에 관심이 없다면 이런 말까지 할 수는 없지 않을까?

 

"나는 자기의 글을 오랫동안 발표하지 않고, 사람들이 자기가 쓴 글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데 호기심을 보이지 않는 작가나 아니면 적어도 글을 쓰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언제나 그것을 갈망합니다 하고 레거는 말하면서, 비록 내가, 나는 그것을 열망하지 않아, 그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대중의 생각에 대해서는 전혀 호기심이 없어,라고 늘 이야기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것을 갈망합니다. 끊임없이 갈망하는 그 순간에 내가 그것에 관심이 없다고 이야기하면 거짓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언제나 그것을 부단히 갈망합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133쪽)"

 

소설 속 주인공(레거)은 모든 인간들, 거장이라고 일컫는 모든 예술가들, 철학가들을 비판하고, 급기야는 모든 예술작품들이 우스꽝스러우며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을 하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대해서는 전혀 듣지 않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대중들의 생각을 갈망한다고 고백한다. 이는 앞서 이야기했듯 얼핏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모순이 그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며 정체성인 것이다. 예술작품에 대해서 그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완성된 작품은 우리를 끊임없이 파괴로 위협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멸망시킵니다. 여기 걸작이라는 이름으로 벽에 걸려 있는 모든 것이 그러하지요 하고 레거는 말했다. 나는 완성된 것, 완전한 것은 결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여기 걸려 있는 소위 완성된 작품에서 완결되지 않은 어떤 것을 끄집어낼 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갑니다. 물론 이때에 나는 이 작품들 안에서 흠이 되는 허점과 그 예술가가 실수한 결정적인 부분을 발견할 때까지 찾는 것입니다.(32쪽)"

 

걸작이라고 일컫는 작품이라도 그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누가 만들어놓은지도 모를 그 위대함에 그저 복종하지 않는다. 그가 생각하기에 '완성된 것, 완전한 것은 결코 없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완성된 작품에서 완결되지 않은 어떤 것을 끄집어내며 한 걸음 앞으로 나간다. 어떤 위대한 예술품이라고 해도 그것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이상 완전한 것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는 어떤 면에서 도식적으로 주입되고 있는 모든 권위 혹은 평판에 대한 항거이며 자유로운 사고에 대한 의지의 표명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모든 허위를 걷어내고 순수한 알맹이만 바라보는 것. 

 

내가 앞서 이 소설의 일관된 테마가 애증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 레거가 자신의 죽은 부인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을 읽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소설의 제일 마지막,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화자이자 소설의 실질적 주인공인 레거를 인터뷰하는 사회자격인 아츠바허에게 레거가 하는 제안이 이 소설의 반전 혹은 백미가 아닐까 한다. 그 모든 냉소와 혐오, 독설, 비판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레거는 결국 아츠바허에게 자신이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 연극을(아츠바허조차 보고 난 뒤 끔찍하다고 했던 그 연극을) 보러 가자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자신의 소원이었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난다. 읽고 난 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은 어쩌면 옛 거장들의 작품에 지나치게 권위적 혹은 도식적으로 붙어 있는 위대함에 대한 비판서라기보다는, 그런 옛 거장들의 작품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자의 고백록이 아닐까 하는.  '베른하르트 나름의, 참으로 베른하르트다운' 고백록 말이다. 결국 증오보다는 애정인 것이다. 이토록 지독하고 격렬한 혐오와 냉소는 반대로 지독히도 격렬히 사랑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것이므로. 그리고 그것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결국 무용한 것이므로.

 

"우리는 사람을 증오합니다. 그럼에도 그들과 함께 있으려고 하지요. 그것은 우리가 오로지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만 계속 살아갈 수 있으며 미쳐 버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혼자서는 오래 견디지 못합니다. 우리는 혼자 있으며 고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혼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스스로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망상입니다.(2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