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윤광준, 『심미안 수업』, 지와인, 2018.

시월의숲 2021. 3. 28. 22:57

 

"예술이 뭐야?"

 

동생이 전화를 걸어 나에게 묻는다. 동생은 갑자기 예기치 않은 시간에 예기치 않은 용건으로 불쑥 전화를 하곤 했다. 오랜만에 전화를 하든 그렇지 않든 개의치 않고, 그 흔한 안부 인사는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단도직입적으로, 용건만 간단히 묻는 것이다. 마치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듯, 생각이 날듯 말 듯하다는 듯, 아... 그게 뭐였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처음에는 이런 식의 전화가 당황스러웠으나 이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번에는 어떤 걸 물어보려고 전화를 했을까 살짝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늘 내 예상을 벗어나는(아니,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질문에 나는 매번 당황하고 만다. 예술이 뭐냐니. 그걸 지금 나한테 묻는 거야?

 

나는 익숙한 당황스러움을 누르고 동생에게 묻는다. 예술? 갑자기 웬 예술? 그걸 왜 묻는 거야? 아, 요즘 대학원 다닌다고 하더니, 과제 같은 건가? 동생이 대답한다. 어, 학교 과제인데 예술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답을 짤막한 문장으로 표현해야 하는 거야. 그러니까 내게 예술은 뭐다, 이런 식으로. 그래서 말인데, 예술이 뭐라고 생각해? 나는 동생의 밑도 끝도 없는 물음에 머릿속에 순간 하얘진다. 아, 예술이 뭐냐면... 그때 나는 얼마 전에 읽었던 윤광준의 '심미안 수업'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오로지 그 책만이 나를 이 당황스러운 순간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결국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아, 내가 생각하는 예술이란, '인간들이 생활하는데 전혀 쓸모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어떤 것'이라고.

 

동생은 내 대답에 썩 만족하지 않은 목소리로 음, 그렇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 하며 고맙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나는 이번에도 당했다는 느낌으로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도 내 대답에 만족할 수 없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족할만한 대답이 있을 수 있을까? 동생이 원한 건 인터넷 검색을 하거나 책에서 나오는 틀에 박힌 정의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틀에 박힌 정의란 또 무엇인가? 나는 갑자기 궁금해져서 인터넷으로 예술의 정의를 검색했다. 거기엔 이렇게 나와 있었다.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창조하는 일에 목적을 두고 작품을 제작하는 모든 인간 활동과 그 산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사실 예술이라는 걸 딱 이거다,라고 표현하는 건 불가능할지 모른다. 예술은 수많은 것들을 아우르고 있고, 사람들마다 각양각색의 정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예술이란 어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이란 사실이다. 다양한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듯이, 예술이라는 것의 정의도 다양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더라도 우리는 직감적으로 예술이라는 것의 의미를 이미 파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굳이 미술관이나 음악회에 가지 않더라도, 어떤 물건을 보거나 음악을 들을 때, 아, 정말 아름답다,라고 느끼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예술적인 것이며, 예술이라는 것이 어디 먼 나라의 유명한 미술관에만 박제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이 뭔가를 묻기보다는, 예술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여러모로 더 유용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더 쉽게 이야기해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름다움이란 것의 기준이 있는가? 그냥 내가 아름답다고 느낀다고 해서 다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해야할까? 어떤 것이 아름답고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가? 어떻게 가치 있는 것을 알아보는가? 저 유명한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보더라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면 그건 가치가 없는 것인가? 도대체 무엇이 하나의 작품을 불멸로 만드는가? 이런저런 의문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런 의문들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얻고 싶다면, 윤광준의 '심미안 수업'이란 책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그때 동생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지만.

 

내가 동생으로부터 들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 책을 내밀었다면 동생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즉각적인 대답을 원했던 동생은 아마 이 책을 당장 집어던졌을지도 모르겠다. 책이 아니라 네 생각을 말해줘! 아마 그렇게 말했겠지. 물론 이 책은 예술에 관한 입문서는 아니다.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정색하고 이야기하는 학술서적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미술과 음악, 건축, 사진, 디자인을 통해서 우리가 보다 쉽게 예술적인 것을 알아보는 눈을 길러주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쉽고, 명쾌하며, 재미있다. 심미안을 가진다면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름의 대답도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이 곧 예술이기 때문이다.

 

예술도 기술의 일종이라고 한다면, 심미안이라는 것도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기술을 가지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눈을 기르는 훈련이 필요한 이유다. 예술에 관한 이런저런 책을 읽는 것 또한 그런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건 거창한 것이 아니다. 저자는 예술의 일상화를 이야기하지만 나는 일상의 예술화를 꿈꾼다. 일상이 예술이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 그 반대도 물론 좋다. 일상의 예술화 혹은 예술의 일상화. 아마도 그 둘의 접점은 같을 것이다. 정말 그와 같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모든 것은 빛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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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일은 외압을 걷어낸 스스로의 선택이어야 의미가 있다. 좋다는 건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지혜를 빌리면 이렇다. 그는 재미가 있어야 하고, 의미를 더해 감동이 넘치며, 누구에게나 쓸모 있는 것이 좋다고 했다. 인류의 스승이 말하는 '좋음'이란 어렵지 않다. 예술의 일상화란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 매일 먹는 끼니의 그릇을 더 아름다운 것으로 놓고, 들리는 음악을 스스로의 선택으로 채우는 것이다. 어떤 것이든 좋으나, 그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선별의 기준을 갖게 되면, 그것이 곧 심미안이다.

아름다움을 파악하고 경험하게 되면, 스스로의 인식과 판단의 범위가 다음 단계로 올라서게 된다. 무용한 것이 유용한 가치로 바뀌는 행복의 선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순환의 시간들을 갖게 되면, 삶이 지루할 틈도 괴로울 틈도 없다.(2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