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디담, 브장, 『나, 여기 있어요』, 교양인, 2020.

시월의숲 2021. 5. 11. 22:11

저는 평소 공감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귀담아듣고, 진심으로 공감을 표시하는 일에 나름 자신 있다고 여겼습니다. 혹여 내가 무심코 한 말에 상대방이 상처 받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적도 많았으니까요. 그래서 간혹 동료들과의 회식자리에서 술기운 때문에 평소보다 말을 많이 하고 집에 돌아온 날에는 후회와 자책으로 머리를 쥐어뜯을 때도 있었습니다. 다음 날 동료에게 물어보면, 단지 말이 좀 많았을 뿐, 특별히 누군가에게 모진 말을 했다거나, 언성을 높인 건 아니지 않느냐는 대답을 듣고는 안심을 하곤 했지요. 물론 술을 많이 먹어서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필름이 끊긴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요(애초에 술을 많이 마시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굳이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술기운 때문에 너무나 쉽게 내뱉은 것은 아닌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말들을 쓸데없이 떠들어댄 건 아닌지 하는 후회의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사람이 언제나 필요한 말만 하고 살 순 없지 않겠느냐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적어도 필요하지 않은 말로 상대방을 상처 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려면 말을 되도록 아껴야겠지요. 굳이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아야겠지요. 그런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 삶을 되돌아보면 늘, 언제나 상대방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해서 나 자신도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리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게 왜? 왜 그런 말로 상처를 받는 거지? 그게 기분 나쁠 일인가? 나는 전혀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네가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거 아니야? 참 유별나기는! 내가 무심코 한 말에 누군가 기분이 나쁜 표시를 내면 우선 그런 생각이 들곤 했지요. 그래서 누군가 내게 사과를 요구하면 좀 어이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슨 사과를 하라는 거야? 그게 사과를 할 일이야?라고. 그런데 내가 무심코 한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분명 거기에는 상대방이 기분 나쁠만한 뉘앙스나 단어, 표정 등이 미묘하게 혼재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상대방이 그렇게 화를 낼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것은 어두운 등잔 밑처럼, 제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지점에 똬리를 틀고 있다가 상대방을 공격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건 바로 그 지점인 것이지요.

서론이 길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나, 여기 있어요>를 읽고 맨 처음 든 생각이 그것이었어요. 나 자신의 공감능력을 믿을 수 없다는 것. 나 또한 알게 모르게 상처 주는 말을 많이도 하고 살았다는 것. 그게 직장동료이든, 가족이든, 내가 가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그러했다는 것. 참 이상한 일이지요. 나와 상관없거나, 심리적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는 깍듯이 예의를 지키면서도, 나와 가까운 사람들, 특히 내 가족들에게는 모진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는 사실. 저는 그것을 깨달을 때마다 혼란에 빠집니다. 가깝고 편한 사람들에게 더욱 잘해줘도 모자랄 판에 남들보다 더 못하게 대하다니요. 그런 바보 같은 청개구리가 어디 있습니까.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나 자신도 주위 사람들의 무심한 말들에 상처를 받은 적도 많으니까요. 그렇다면 나 자신은 그러지 않아야 할 텐데 그 조차 쉬운 일은 아닌 듯싶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말수를 줄이려고 하는 것이지요. 말을 많이 하지 않으면 상처 주는 말 또한 적게 할 테니까요.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경청, 즉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라는 사실. 이건 누구나 다 아는 진리가 아닙니까? 하지만 진리의 속성이 그렇듯, 누구나 다 알지만 직접 실천하기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 또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나, 여기 있어요>를 읽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요즘 내가 처한 상황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어떻게 써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차에 문득 제 요즘 생활과 평소 느끼고 있는 감정들이 결합되어 자연스레 이런 식의 글쓰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저는 성폭력이라는 주제보다는 좀 더 넓은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말이죠. 책 속에서,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공감하지 못하고 2차 가해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주인공 자신이 그것이 성폭력인 줄 모르는 상황을 보면서, 가해자가 하는 행동이 마치 예술가란 그럴 수 있다는 식으로 비치는 걸 보면서, 그것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심각한 폭력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걸 보면서 공감능력이란 어떤 걸까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달까요. 내가 느끼는 것과 상대방이 느끼는 것, 제삼자가 느끼는 것이 모두 다를 수 있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까 본질, 즉 무엇이 문제인가를 파악하는 능력이 결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앞서도 이야기했듯, 내가 무심결에 하는 행동(사회적으로 다수에게 용인되는 행위라고 해서 그것이 곧 정당한 것은 아니며, 또한 그 용인이라는 것 자체가 굉장히 임의적이고 폭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심각한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을 항상 인지하고 있어야 비로소 그 사람은 공감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용기.

문제점과 모순을 인지하고 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중요한 건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요. 이 책의 주인공들이 보이지 않는 차갑고 견고한 벽 앞에서 무릎 꿇고 좌절했다면 우리는 이 책을 영영 읽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쓴 작가에게 용기를 내주어 참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 보여줘서 고맙고, 폭력에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워주어서 고맙다고. 저는 이 책이 지금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고통을 숨기고 있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분명 희망의 빛을 심어주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둠이 아니라 빛 쪽으로 조금씩 걸어 나올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생각을 완벽하게 알지 못합니다. 공감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상대방의 의중을 다 파악할 수 있는 건 아닐 겁니다. 결여된 공감능력을 채우기 위해서는, 앞서도 이야기했듯 '경청'이 우선이 아닐까요. 일단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리고 상대방이 처한 상황과 마음을 헤아려보는 것. 어디선가, 누군가, 미약한 소리로 '나, 여기 있어요'라고 조심스레 되뇔 때, 그 소리를 듣고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인터넷으로 이 책에 대한 검색을 하다가 저자들의 인터뷰 영상을 보았습니다. 그 영상에서 작가는 이런 말을 합니다. 자신이 그 사건으로 소송을 진행하면서 2차 피해를 입고 여러 가지로 힘들 때, 문득 연락이 뜸했던 지인이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해서 만났는데,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어디 가고 싶냐고 물어보며 같이 돌아다니기만 했다고. 그런데 그게 참 좋았다고. 피해자를 만날 때 그 사건에 대해 캐묻기보다는 아무런 질문 없이 그저 '너 가고 싶은 데가 어디야?' 혹은 '오늘 뭐 하고 싶어?'라고 묻는 것이 때론 어떤 위로보다도 힘이 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 인터뷰를 보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람이야 말로 공감능력이 탁월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나, 여기 있어요>는 만화책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으며, 쉽게 읽히지만 결코 쉽게 넘길 내용은 아닙니다. 이 책은 그 존재만으로도 어떤 이들에게는 커다란 위로이자 용기, 희망이자 치유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 제 개인적인 감상을 덧붙인다면, 공감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맨처음 고백으로 돌아가서, 내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이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도 있음을 늘 생각하면서 살기를 다짐해봅니다. 누구에게나 다 '여기', '이곳'에 당당히 존재할 이유는 충분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