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나의힘

유리창

시월의숲 2019. 11. 9. 17:01

유리창




그 말은 유리창에 와 부딪치고 있었다. 차라리 깨져버렸다면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유리창이 깨지면서 내는 소리가 그 말을 덮어버렸을 텐데, 아직도 들린다. 유리창을 흔들고 있다. 바람 소리는 아니다. 바람 소리였다면 바람 소리대로 그 말을 옮겼을 것이다. 바람의 말. 바람의 문장. 이런 소리는 내 귀가 알 바 아니다. 알아서 차단하는 소리는 알아서 차단되는 말을 만들어낸다. 바람이 분다. 창문을 흔드는 바람 소리는 지금도 들을 수 있지만 지금도 유리창에 와 부딪치는 말과는 소리부터 다르다. 나는 다른 소리를 듣고 있다. 다른 말이 들리고 있다. 다른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귀가 있다. 그 말을 기다리고 있는 귀가 유리창을 향해 있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가? 그것은 말이다. 내게 도착한 말이다. 도착해서 반복되는 말이다. 귓가를 맴돌고 혀끝을 맴도는 그 말이 창밖으로 어떤 형상을 만들어내고 어떤 형상이 찢어지는 소리를 만들어내고 종이처럼 얇은 그 형상이 괴로워서 내는 소리를 반복하고 있다.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와서 들려주고 있다. 그는 언젠가 내가 괴로워했던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언젠가 내가 몹시도 동경했던 사람처럼도 보인다. 그는 언젠가 사람이 아니 되고 싶었던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는 언젠가 죽지 못해 내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일 수도 있다. 죽지 못해 내가 되었던 그가 지금도 창밖에 있고 유리창에 있고 깨지지 않는 소리를 내고 있다. 그가 돌아갈 때까지 깨지지 않는 소리가 있다. 깨질 때까지 돌아가지 않는 소리가 있었다.


- 김언, 『한 문장』, 문학과지성사, 2018.



*
시인은 어떤 말을, 유리창에 와 부딪히는 말을 듣고 있다. 바람 소리도 아닌, 시인에게 도착한 어떤 말을 듣고 있다. 나는 처음 그가 바람의 말, 바람의 문장을 듣고 있는 것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바람의 말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귓가를 맴돌고 혀끝을 맴도는 어떤 말이다. 시인은 무슨 말을 듣고 있는가? 어떤 말의 소리를 듣고 있는가? 그가 언젠가 괴로워했던 사람같은, 그가 몹시도 동경했던 사람과도 같은, 죽지 못해 내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같은, 유리창에 와 부딪치고 있지만, 유리창이 깨지면서 내는 소리는 아닌, 그가 돌아갈 때까지 깨지지 않는 소리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 소리의 얼굴을 명확하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의 시에는 문장들이 흘러 넘친다. 마치 꼬리에 꼬리를 문 형상처럼 반복적이지만 미묘하게 다른 문장들이. 이 시는 어쩌면 언어, 그러니까 '말'을 다루는 시인으로써 직면하게 되는 근원적인 고뇌 혹은 숙명(?)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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