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에게 말을 건넵니다. 듣지도 대답하지도 않는 당신, 이곳에서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인 당신에게.(피에르 베르제,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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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래전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당신께 전하는 안부입니다. 이런 것도 안부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늘 그렇듯, 이 편지는 부치지 않을 것입니다. 부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나는 늘 당신을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이 부디 평온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나, 나는 곧 당신입니다."
'부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편지'에 대해서 늘 생각합니다. 부치지 '못한' 편지가 아니라 부치지 '않는' 편지 말입니다. 부치지 못한 편지는 그것을 상대방에게 꼭 전달해야 한다는 간절함과 부치지 못한데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지지만, 부치지 않는 편지는 그것이 상대방에게 꼭 전달되지 않아도 된다는 단호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쓸 수밖에 없는 절박함이 느껴진다고 저는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여기, 또 다른 형태의 편지가 있습니다. 이 편지들은 말하자면, 부치지 못한 편지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 부칠 수 없음을 명백하는 아는 자가 쓴, 부치지 않는 편지이자, 편지를 받을 당사자 이외의 모든 사람들에게 부치는, 좀 독특한 형태의 편지입니다. 그러니까 이 편지를 받아볼 단 하나의 수신인은 이미 이 세상에 없고, 그것을 읽는 사람은 우리 모두인 그런 편지.
이브 생 로랑의 연인이었던 피에르 베르제. 그가 죽은 자신의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이브 생 로랑은 이름만 들어본 정도였고 피에르 베르제는 더욱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이브 생 로랑과 피에르 베르제의 이름이 내 가슴속에 선명히 각인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누군가의 연인으로 불리는 삶을 산다는 건 어떤 것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지만, 내 생각에 피에르 베르제는 이브 생 로랑의 연인이라는, 세상이 자신에게 붙여준 타이틀을 싫어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자랑스러워했고 자신의 연인이 지닌 명민함과 천재성, 그가 이룬 업적을 찬미하는데 진심이었으니까요.
죽고 난 뒤에 보내는 이 절절한 사랑 편지가 다 무슨 소용인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도저히 그에게 가 닿을 수 없는, '듣지도 대답하지도 않는' 이 추억과 사랑의 말들이 다. 이것은 쓰면 쓸수록 실패하는 말들의 허무하고도 무용한 놀이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확신은 이 편지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 강하게 들었습니다.
이 편지들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이브 생 로랑이지만 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바로 피에르 베르제입니다. 나는 처음에는 이브 생 로랑에 대해서 궁금했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피에르 베르제를 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연인과 함께 했던 모든 추억과 그를 향한 사랑의 말들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피에르 베르제가 이브 생 로랑에게 보내는 편지이지만, 결국 이는 피에르 베르제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의 연인에 대한 추억을 상기시키며 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영광, 그 찬란함의 시절에 대해 말하면 말할수록 그것은 이브 생 로랑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한 바로 자신, 피에르 베르제라는 한 남자에 대한 경이로움으로 수렴됩니다. 그래서 결국 사랑이란 어떤 한 사람을 끝까지 알아봐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래서 이 편지들은 결코 실패할 수 없고, 무용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서로를 알아본다는 것. 그가 바로 내 연인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누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부지불식간에 느낀다는 것, 안다는 것. 그리하여 그 사랑이 가고 없는 이 순간에도 보낼 길 없는 이런 편지를 쓸 수밖에 없다는 것. 앞서 이야기했듯, 부치지 못한 편지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 부칠 수 없음을 명백하는 아는 자가 쓴, 부치지 않는 편지이자, 편지를 받을 당사자 이외의 모든 사람들에게 부치는, 이런 편지를.
"오늘, 연극이 막을 내리고 조명은 꺼졌어. 서커스단의 천막은 해체되고, 나는 나의 모든 추억과 함께 홀로 남았지. 어둠이 내리고, 먼 곳에서 음악이 들려와. 그러나 그곳에 갈 힘이 없네."(146쪽)
자신의 연인과 함께 했던 영광의 순간들이 끝난 뒤 홀로 남은 한 남자의 마지막 고백은 그래서 더욱 쓸쓸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마지막 편지를 읽고 슬픔이 목까지 차오르는 것을 꾹꾹 눌러야 했습니다. 이브 생 로랑뿐만 아니라 피에르 베르제도 이제 이 세상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그는 사랑을 안고 떠났지만, 우리에게는 그가 쓴 편지가 남아 있으니까요. 그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편지는 이렇게 완성이 되었습니다.
두서없는 이 편지를 마무리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부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편지'에 대해서 늘 생각합니다. 저 또한 이 편지를 당신에게 부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더, 오래전에 제가 쓴 글을 끝으로 마지막 인사를 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내가 당신께 전하는 안부입니다. 이런 것도 안부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늘 그렇듯, 이 편지는 부치지 않을 것입니다. 부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나는 늘 당신을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이 부디 평온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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