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구부전(舅婦戰)

시월의숲 2022. 3. 1. 21:40

 

듀나의 『구부전』을 읽었다. 나는 공상과학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소위 SF 장르물을 거의 읽지 않는데, 이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장르물에 익숙하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공상과학이 다루는 여러 소재들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듀나의 소설은 흥미가 생겨서 찾아 읽곤 한다. 지금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오래전에 『태평양 횡단 특급』을 읽었고, 소설은 아니지만 영화와 관련된 에세이인 『가능한 꿈의 공간들』도 좋았다. 때때로 <듀나의 영화낙서판>에 올라온 영화 리뷰들도 즐겨 읽는다. 고정되고 편협한 관념을 뒤흔드는 상상력과 비타협적이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의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당연하게도 나는 그것들을 읽거나 보지 못했으므로), 그가 이야기하는 수많은 소설 혹은 영화의 레퍼런스들의 향연은 때로 경이로움마저 느끼게 하는 것이다.(그것을 소위 마니아적이다 혹은 매니악하다고 하는 것이 아닐지?)

 

아무튼 비교적 최근에 나온 『구부전』은 정말 오랜만에 읽은 듀나의 소설이다. 총 여덟 편의 소설이 실려 있고, 끝에 실린 작가의 말에는 각각의 소설에 대한 코멘트가 달려 있어서 소설을 읽는데 도움이 되었다. 소설의 속 다양한 SF적 소재들과 각각의 세계관에 대해서 내가 이야기할 능력은 없고(이해가 잘 안 되는 내용도 있었지만, <추억충>이나 <가말록의 탈출>, <죽은 자들에게 고하라>는 꽤 인상적이었다), 나는 다만 표제작인 <구부전>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그 소설은 처음 읽자마자 빠져들었는데, 그건 소설의 소재가 장르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쉽게 받아들일만한 뱀파이어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뱀파이어 장르라고 해야 할까. 작가의 말에 실린 내용을 잠시 인용하자면, '나는 뱀파이어를 섹시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그리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뱀파이어들이 내가 생각하는 뱀파이어의 정상적인 표준에 가장 가깝다.'라고. 

 

듀나의 말처럼, <구부전>에 나온 뱀파이어들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짐승에 더 가깝다. 개중에는 '생각'이란 걸 하는 캐릭터가 나오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들에게 익숙한, 피부가 하얗고 섹시하며 사람을 홀릴만한 매력을 가진 뱀파이어는 결코 아니다. 더구나 배경이 조선시대다. 조선시대의 뱀파이어라니. 엄밀히 말해 뱀파이어는 아니지만(말하자면 뱀파이어도 넓게 보면 일종의 좀비라고 할 수 있겠지만, 좀 더 의식이 있는 좀비랄까? 뭐, 어쨌든), 좀비가 나오는 조선시대 배경의 영화 <창궐>과 영화보다는 훨씬 더 잘 만든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으로 익숙한 우리에게, <구부전>의 소재는 그리 참신하다 느껴지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나온 연도를 살펴보면, 듀나의 <구부전>은 2005년에 잡지에 실렸고, <창궐>은 2018년에, <킹덤>은 2019년에 나왔으니, 어쩌면 듀나의 저 소설이 원조격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물론 나는 여기서 예로 든 것 외에 소설이나 영화에서 조선시대 좀비 혹은 뱀파이어를 다룬 것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듀나의 <구부전>은 더 놀랍다. 소재도 소재지만 그것을 조선시대라는 시대 배경 속에 천연덕스럽게 녹여낸 그의 입담에 그저 '닥치고' 읽어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뱀파이어가 된 자와 뱀파이어가 되지 않은 자의 설정도 흥미로웠고, 그것이 시아버지(뱀파이어가 된 자)와 며느리(뱀파이어가 되지 않은 자)의 관계라는 설정도 흥미로웠다. 또 뱀파이어를 태양 아래서도 살아남게 하는, 비밀의 처방이 담긴 책자를 다루는 방식 또한 조선이라는 시대 상황을 영리하게 이용한 것 같아 무릎이 탁 쳐졌다. 처음 나는 <구부전>이라는 제목이 뱀파이어를 지칭하는 조선시대의 용어가 아닌가 생각했다. <별주부전>이나 <심청전>처럼, 뱀파이어를 지칭하거나 상징하는 이야기일 거라고. 제목 옆에 한자가 병기되어 있었지만, 이는 한자에 대한 내 무지만을 일깨워줄 뿐이었다. 소설을 다 읽고도 제목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결국 한자를 찾아봤는데, 시아버지와 며느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의 싸움에 대한 이야기를 읽지 않았나. 

 

원래는 영화 계획으로 어느 정도 시나리오도 진행되었다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왜 중단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이 소설이 훗날 나올 <창궐>과 <킹덤>의 모티브가 되지는 않았을까? 정말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기존에 나온 영화나 드라마보다도 훨씬 더 재밌는 영화가 탄생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