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검은잎

단상들

시월의숲 2022. 12. 11.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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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에 문득 어둡고 환한 도로를 걸어가는 젊은이들(?)을 보니, 내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그래서 매번 같은 곳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놀이를 했었던 그때 그 시간들이.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것은 없지만, 최소한 길 위에서 서성거리지는 않게 되었다. 그건 불행일까 다행일까. 나이가 든다는 건 어쩌면 단념하는 법을 조금씩 익혀나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라는 건 사실 존재하지 않고, 기대가 있다면 다만 무참히 꺾일 뿐이라는 걸.(2022.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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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첫눈은 서울에서 보았다.

문득 만나는 것과 보는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 첫눈을 '만나는 것'과 첫눈을 '보는 것'. '만나다'와 '보다'의 간격에 대해서. 그 사이, 어떤 지점에 대해서. 나는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첫눈을 '만난' 것일까 아니면 '본' 것일까?(2022.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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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읽히지 않아 시를 읽는다. 시가 읽히지 않아 소설을 읽는다. 이도 저도 읽히지 않아 에세이를 읽는다. 에세이도 읽히지 않아... 그래, 나는 지금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다. 아무것도 읽을 수 없다. 집중할 수 없다.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병에 걸린 듯하다. 원인은 불명. 이 병은 수시로, 간헐적으로 찾아오곤 하는데, 이번엔 그 시기가 좀 길다. 어쩌랴. 읽히지 않으면 읽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이 병에 약은 없고, 굳이 있다면 시간이 약임을 나는 알고 있다.(2022.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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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이 되어서일까. 카페마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불을 밝히고 있고 당연한 듯 캐럴이 흘러나온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리고 오늘, 내가 사는 이곳에도 눈이 내렸다. 모든 계절이 그러하겠지만, 유독 겨울은, 한 해가 가고 다른 해가 오는 겨울이라는 계절은 참으로 새삼스럽지 아니한가.(2022.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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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관계, 어떤 상황, 어떤 감정, 어떤 것들이 한순간 진부해지고 지겹다 생각될 때, 나는 영원을 생각한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 그 사실을 떠올릴 때면 나는 조금 겸손해진다. 진부함과 타성의 늪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힘을 얻는다. 아주 잠시라 해도.(2022.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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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것은 나의 인생일까요? 아니면 그 속에 미끄러져 들어간 어떤 다른 사람의 인생일까요?

-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중에서

 

도무지 이 문장이, 어느 책에서 읽은 것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이제야 찾았다. 파트릭 모디아노였구나.(2022.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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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로부터 '넌 친절하지만 정이 없어'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내게 뭘 바라는 것일까. 나는 그 누구에게도 바라는 것이 없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내가 정이 없다면, 그건 어렸을 때부터 정을 받아보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나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하루키 소설 속 인물들처럼 나 역시 어딘가 심각하게 손상된 채로 커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2022.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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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찾는 것은 모두 지나가버렸다. 나는 늘 너무 늦다. 하지만 먼저 알았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졌을까?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은 지나간 것들을 아쉬워하는 것. 그리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기 위안을 삼는 것. 그래, 눈물은 흘리지 말고.(2022.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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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너그러웠던 시기는 초등학생 때였던 것 같다. 그 이후부터는 조금씩 속이 좁아지기 시작해서, 지금은 타인의 마음을 점차 이해할 수 없는(이해하지 않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사람을 대하면 대할수록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진다. 알면 알수록 모르겠다. 정말 모를 일이다.(2022.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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