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의고리

나는 꿈꾼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누군지 나도 모른다.

시월의숲 2023. 2. 25. 16:16

 

*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페소아의 시를 읽는다. 나는 지금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이동 중이다. 페소아가 태어난 그곳. 시의 한 구절을 마치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린다.

 

나는 꿈꾼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누군지 나도 모른다.’

 

 

*

여행지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떨렸다. 그것은 생애 첫 유럽 여행이라는 것도, 스페인에 특별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포르투갈이라는 나라 때문이었다. 내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던, 내게 알 수 없는 위안과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해 준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의 고향이 바로 포르투갈 리스본이었던 것이다.

 

그런 내 떨림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페소아를 보러 간 자유 여행이 아니었기에 페소아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리스본에서 페소아처럼, 혹은 그가 만들어낸 수많은 이명(異名)들 중 하나가 된 것처럼 그 도시를 걸었다. ‘사람들로 가득한 텅 빈거리를.

 

포르투갈 리스본의 골목을 걸어갈 때 우연히 작은 서점을 지나쳤는데, 시간 상 들어가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나는 그 나라의 언어를 모르므로 당연히 서점에 있는 어떤 책도 읽을 수 없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서점에 들어가 점원에게 간절히 묻고 싶었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책이 있나요?”

 

나는 리스본에서 페소아의 책을 한 권 사고 싶었다. 읽지는 못하더라도 간직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러지 못했고, 그 아쉬움은 여행의 마지막 날, 바르셀로나 공항에서 터져 나왔다. 나는 공항에 있는 서적 코너에 가서 페소아의 책이 있는지 더듬더듬 물었고 대답은 당연하게도, NO! 였다.

 

아쉬운 마음으로 진열된 책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익숙한 인물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 영원히 늙지 않는 얼굴로 해맑게 웃고 있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환히 웃고 있는 그녀를 찍었다. 이런 말,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배수아가 번역한 <안네의 일기>를 읽으라는 계시인가 보다 하면서.

 

 

*

리스본은 수수하고 조금은 차가워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그 속은 복잡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도시였다. 스페인 마드리드와 같은 세련됨이랄까 화려함은 좀 덜했지만, 마드리드가 가지지 못한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었고, 그것은 즉각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페소아와 그가 창조한 수많은 이명(異名)들이 걸었을 리스본의 그 골목을 직접 걸어보지 않고서는 쉽게 알 수 없는 매력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애석하게도 나 역시 그 매력을 충분히 느껴볼 만큼 오랜 시간 머무르지는 못했다는 사실에 좀 슬펐지만.

 

귀국을 해서 헛헛한 마음으로 SNS를 보다가 리스본을 여행한 누군가가 페소아가 살았던 집을 방문했을 때 구입했던 입장권 사진을 올려놓은 것을 보았다. 나는 그것을 보고 더욱 페소아가, 리스본이 그리워졌다. 모든 여행이 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내 리스본 여행(사실 여행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잠시 지나쳤던)은 많은 아쉬움만 남긴 채 끝났다. 마치 아주 짧은 꿈을 꾼 것처럼. 꿈인지 현실인지, 잠 속의 꿈인지, 꿈속의 잠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로.

 

하지만,

 

페소아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면서도 사실이 아니다. 리스본은 페소아의 도시이므로 어쩌면 나는 그곳, 리스본에 다녀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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