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의고리

여행의 위험

시월의숲 2023. 1. 15. 17:19

 

여행의 위험은 우리가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즉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물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정보는 꿸 사슬이 없는 목걸이 구슬처럼 쓸모없고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된다.

 

-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중에서

 

 

그렇다면 여행을 하기에 적절한 시기와 제대로 된 준비라는 건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걸까. 여행이란 때론(어쩌면 많은 부분) 즉흥적이지 않은가? 여행을 완벽하게 준비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나는 괜히 심술이 나서 저 문장을 읽고 또 읽으며 속으로 계속 이런저런 의문을 늘어놓는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읽고 넘어갈 수 있는 문장일터인데 왜 그리 따지고 드는 것인가?

 

어쩌면 나는 그런 걱정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쓸모없고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아니, 내심 그런 걱정을 했다.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생애 처음으로 떠나는 유럽 여행이 아니던가! 더구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라니! 정말이야? 내가 정말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간다고? 가기 직전까지 나는 나에게 그렇게 묻곤 했다. 그 나라를 내가 직접 선택한 것도 아니고, 애초에 유럽 여행을 가고자 계획했던 것도 아니었으니. 정말이지 엉겁결에 단체 여행에 끼게 된 것이다.

 

실제로 내가 바란 여행이란, 배수아가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이란 책에서 썼듯이, ‘길이나 지도, 낯선 나라, 인상 깊고 아름다운 풍광, 새로운 문물, 혹은 새로운 자신, 두근거림이나 자유, 혹은 모험이나 떠남, 대개는 돈을 지불함으로써 현대인이 얻게 되는 어떤 종류의 비일상적 체험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아마도 단지 지극히 개인적이고 정적인 꿈, 고통의 또 다른 이름으로서의 꿈, 혹은 정체불명의 그리움, 슬픔과 체념으로 가득 찬 발자국, 혹은 그러한 감정의 순간에 우리를 사로잡는 은밀하고도 슬픈 몽환과도 같은 것이어야 했다. 그리하여 이해할 수 없는 말과 얼굴들로 이루어진 나의 또 다른 장소로 향하는 여행이자 동시에 한때 나의 육신을 이루었을지도 모르는 돌과 쇠를 찾아가는 여행이기를 나는 내심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애석하게도 이번 여행은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자발적이고도 개인적인 여행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행이란 늘 예기치 못한 것들을 동반하는 법. 나는 이번 여행에서 예기치 못한 순간들을 여러 번 만났다. 그리고 그것들은 현실이 아니라 늘 꿈처럼 몽롱하고 아득하게 다가왔다. 그것은 낯설고, 때로 공격적이며 대체로 무신경했지만 드물게 아름다웠다. 유럽 도시 특유의 건물과 그 건물 창가에 여지없이 놓여 있던 작은 화분들, 그리고 좁은 골목들도 인상적이었지만, 그곳의 눈부신 태양과 건조한 바람, 사이프러스와 올리브 나무,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특유의 냄새, 그리고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황량한 대지와 회색빛 돌들 또한, 자신들이 그 땅의 주인임을 당당히 드러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알랭 드 보통의 우려처럼, 위험한 여행을, 말하자면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즉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도 내심 알고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늘 그런 여행을 하곤 한다는 것을. 여행의 속성이란 어쩌면 그 위험성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