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검은잎

단상들

시월의숲 2023. 7. 13.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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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해,라는 말은 얼마나 힘이 없고 무색한가.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마음을 정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왜냐하면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이 없는데 반드시 원해야 하는 상황이란 얼마나 난감한가.(2023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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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가 서점에 갔다가 배수아의 책들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나는 무슨 칭찬을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문득, 어떤 책을 보고 누군가를 떠올리는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2023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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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는 시간들을 지나고 있다. 책도 읽히지 않고, 영화도 시들하고, 사람들과의 만남은 더욱 하기 싫은, 그런 상태. 며칠 야근을 해서 좀 지쳤기 때문일까. 아님 본격적으로 여름이 오려하기 때문일까. 멍하게 있는 나와는 달리, 오로지 시간만이 열심히 제 할 일을 하고 있다.(2023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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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이거나 매일 만나는 사람이거나, 다들 하나같이 숫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돈, 주식, 투자, 부동산, 시세, 승진, 순위, 서열 뭐 그런 것들을. 내가 가장 약한 것이 숫자인데, 대화를 할 때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하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니.(2023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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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가 만개한 줄 나는 미처 몰랐네. 나는 능소화 하면 오래전에 읽었던 박완서의 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이 떠오른다. 무슨 내용이었는지 거의 잊어버렸지만, 소설 속에 묘사된 능소화만이 또렷이 떠오르는 것은 어쩐 일일까.(2023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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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는 모든 말들이 혁명적으로 들리는구나. 가장 혁명적이지 못한 내게 네가 하는 말들이란. 그런 내가 너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런 내게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것이냐. 나는 늘 말문이 막히기만 하는데.(2023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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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 위로 얇은 물의 막이 감싸고 있는 것만 같다. 손을 갖다 대면 착, 하고 물기를 머금은 소리가 날 것만 같다. 착, 착, 착. 雨中과 水中은 결국 같은 말이 아닐까. 적어도 이 여름, 장마철에는.(2023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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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을 하고 집에 오면 멍하니 있는 시간이 점차 길어지고 있다. 배가 고프니 저녁을 먹긴 먹는데, 먹기 전에도, 먹고 나서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는다. 그러다 보면 또 잘 시간이다. 그렇게 하루가 간다.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그저 시간이 아깝구나 하는 생각만 멍하니 할 뿐이다.(2023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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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을 언제 샀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우산은 내가 사지 않아도 늘 내 곁에 있었다. 버스에 놔두고 내리기도 하고, 식당에서 누군가가 내 우산을 들고 가버리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우산은 내게 다시 돌아오거나, 새로운 우산이 - 어떤 연유에서건 - 생기곤 했던 것이다.

 

어딘가 우산만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있어, 모든 사라진 우산들이 그곳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세상에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세상의(적어도 내가 아는 세상의) 모든 우산들은 서로 돌고 도는 것은 아닐까.(2023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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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매미 소리를 올여름 처음으로 인지했다. 하지만 아직 여름의 한가운데라고 하기에는 어쩐지 망설여진다. 이상하지, 폭염경보 문자도 여러 번 받았건만. 하지만 푸른 잎 무성한 도로를 지나면서는, 습도 높은 여름 대기 특유의 맛이 느껴졌다. 울분 같기도 하고 설렘 같기도 한 그것.(2023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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