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검은잎

단상들

시월의숲 2023. 9. 16.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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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펄 끓는 늪지에서 상승한 고통스러운 몽상의 제국이 팔월의 도시 위로 둥실 떠올랐다. 사람들의 꿈을 잠식했다. 한여름의 체온보다 더 뜨거운 공기는 투명하고 견고한 총알이 되어 아주 느린 속도로 더운 심장에서 심장으로 관통하며 여행했다.(배수아,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중에서)

 

뜨거운 여름이면 생각나는 배수아의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팔월의 도시 위로 둥실 떠오르는, 펄펄 끓는 늪지, 고통스러운 몽상의 제국, 잠식당하는 꿈, 견고한 총알이 되어 느린 속도로 더운 심장에서 심장으로 관통하는 뜨거운 공기. 아, 타는듯한!(2023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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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과거에 내가 쓴 글을 읽고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쥐구멍으로 숨고만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무언가를 쓴다면, 그것은 창피함을 딛고 일어서는 길인가 아니면 더욱 뻔뻔해지는 일인가.(2023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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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이 진지해지지 말자. 어울리지 않게 진지해진다는 것 자체가 과도한 감상을 덧입히는 일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그렇게 진지한 사람도 아니잖아? 한없이 가벼워지고 싶다. 모든 자기 검열에서 벗어나고 싶어.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린 게 아니라, 그때는 그때 나름의, 지금은 지금으로서 최선의 생각이었음을. 내가 나 자신을 긍정해야지 누가 나를 긍정해 준단 말인가? 쓸데없는 생각 말고 잠이나 자자. 나의 가장 큰 쾌락인 잠을 나는 왜 자꾸 유예하고만 있는 것인가?(2023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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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초인종 소리가 계속 들려서 겨우 일어나 화면을 보니 누군가 아파트 출입문 앞에서 서 있었다. 그 시간에 내 집에 올 사람은 당연히 없었고, 화면 속 그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나는 겁이 난다기보다는 좀 짜증이 났다.

 

누구시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그는 현관문을 저쪽으로 멀어지며 핸드폰을 든 채로 동과 호수를 확인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아마도 아파트 호수를 잘못 누른 것 같았는데, 그 이후로 다시 벨이 울리지는 않았으니 실제로도 착오가 맞았을 것이다. 덕분에 아침잠을 설치고 말았으니...(2023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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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누가 타인의 삶을 단정 지을 수 있단 말일까?(20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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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엔 바다에 자주 가게 된다. 나와 여름바다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호젓한 바닷가였는데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시커먼 돌 위에 올라가 열심히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한 두 명 정도 있었고, 몇몇은 무언가를 열심히 따고 있었다. 나는 그저 그들을, 바다를 바라보았다.(20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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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어떤 이의 말에 화가 난다는 건, 내심 그 말이 진실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아직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니까, 아직은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인정해야만 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화가 나는 것이고.(20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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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메일함을 열어보니, '오래된 책장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간'이라는 제목의 이메일이 와 있다. 예스24에서 보낸 광고 메일이었지만, 어쩐지 바로 삭제하지 못하고 클릭을 하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래된 책장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간이라니. 나는 그 문구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2023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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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때로 어떤 예감이 ― 그것도 아주 강한 예감이 ― 든다고 말할 때, 그것은 때로 허황된 바람일 때가 많다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2023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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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혹은 내 기억 속에 누군가 남겨진다는 건.(20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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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나는 초등학생 때가 가장 너그러웠고, 그 이후로 점차 화를 잘 내는 어른으로 큰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너그러워야 했던 그때가 지금에 와서야 그리 억울했던 것일까? 그래, 너그러움이 아니라 인내라고 해야 할지도. 인내심은 나이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겠다.(2023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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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어놓은 창으로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흘러들어온다. 무슨 음식일까? 오늘은 에어컨을 켜지 않고 있다. 어쩌면 저녁까지 켜지 않아도 될 듯하다. 창문을 더 활짝 열었다. 세탁기를 돌리고,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넌다. 토요일 오후가 이렇게 흘러간다. 조용하지만 확실하게.(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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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산다는 게 지저분한 오물들을 입안에 잔뜩 처넣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이 입안에서 그 오물이 자꾸만 커져가는 듯하고, 그러한 느낌, 그러한 의식 자체가 우리의 숨통을 짓눌러오는 때가 있다.(최승자,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중에서)

 

요즘 들어 그런 느낌이 자주 든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이렇게 돌아가도 되나 싶은. 아주 친절하게도 누군가 지저분한 오물들을 입안에 잔뜩 처넣어주고 있는 것만 같다.(2023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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