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검은잎

단상들

시월의숲 2023. 6. 17.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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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시인의 시집 출판과 관련한 설문조사 항목을 보고 있으니, 문득 내가 대학 신입생 시절, 설문조사를 한다며 다가왔던 어떤 이가 생각났다. 그의 목적은 결국 전도였다. 전도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설문조사를 빌미로 다른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달까,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설문조사란 그런 것인가? 그것은 누군가를 교화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특정 혹은 불특정 대상의 생각을 듣고자 함이 아닌가? 차라리 입장문이면 어떤가. 당당하게 말이다.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거나 우매한 민중을 가르치기 위한 것을 설문조사라고 한다면 그것은 독자에 대한 기만이 아닌가?(2023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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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지금까지 나를 지탱한 것은 불안이었을까. 퇴근길, 불안의 어두운 그림자가 또 나를 뒤따른다. 사라진다면 그것은 그림자가 아닌 것인가? 그림자의 주인이 사라져야만 하는 것일까? 떼려야 뗄 수 없는 것들. 이래저래 어찌할 수 없는 나와 내 삶을 어찌할 수 없는 눈길로 바라보고만 있다.(2023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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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어떤 행위가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 생각 없이 하게 되는 동물인 것 같다. 그렇기에 남겨지는 자괴감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 애초에 쓸모없는 인간이 쓸모없는 짓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가? 아, 인간이라는 변명 뒤에 숨지 말자. '인간인 '나'가 아니라 '나라는 인간' 말이다.(2023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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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더욱 기억에 혼선이 생긴다. 내가 말하는 과거의 일들이란 그때의 기억과 저때의 기억이 뒤엉킨, 그야말로 상대방은 전혀 알지 못하는 새로운 기억이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A와 함께한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B와 함께 했던 기억을 섞어서 이야기한다.

 

사람은 변하지만 장소는 변함없기 때문일까. 나는 어떤 공간은 기억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갔는지는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게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아니라 '그 장소' 혹은 그때 나를 눈부시게 했던 '햇살'이나, 낙엽을 태우는 냄새 같은 것, 형용할 수 없던 색색의 노을 같은 것이었을까.(2023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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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언제나 양면적이다. 사랑을 받을 때의 기쁨이 그 사랑을 잃을 때의 슬픔을 의미하는 것이듯이. 그러니 상처받지 않고 평정 속에서 살아가려면 언제나 이면을 보고자 하는 긴장을 잃어서는 안 된다. - 은희경 <새의 선물> 중에서

 

상처받지 않고 평정 속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기쁠 때는 슬픔을, 슬플 때는 기쁨을 생각하는 것. 마냥 기쁘기만 한 것도, 한없이 슬프기만 한 것도 없는, 아니 없다는 것을 아는 그런 상태. 그것은 이상적인가?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가?(2023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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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왼쪽 발등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건초염이라고 한다. 요즘 무리해서 많이 걷거나 뛰거나 한 일이 있냐고 노년의 의사는 물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한 운동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의사와 나는 동시에, 그런데 왜?라는 표정을 서로 쳐다보았다.(2023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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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발의 통증이 점차 사라지는가 싶더니 오른발이 아프기 시작한다. 마치 통증과 술래잡기를 하는 것 같다. 제대로 걷지를 못하니 본의 아니게 나는 무척 천천히 걷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 때론 조금 느리게 가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더 이상 통증과 술래잡기는 하고 싶지 않은데.(202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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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출근하지 않고 쉬었는데, 아침에 이상하게 잠을 설쳤다. 새벽 다섯 시부터 한 시간씩 계속 자다 깨다 했다. 오늘이 원래 쉬는 날이 아니라는 걸 몸이 아는 걸까. 머리로는 쉰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이 익숙한 패턴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까. 어쨌든 내일은 푹 자기를.(2023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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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머물러도 괜찮아'와 '마냥 머무를 수는 없어' 사이에서.(2023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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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는 무슨 국제도서전 같은 것을 하나 본데, 그런 것이 있는 줄도 처음 알았거니와, 지방에 사는 나와는 다른 세상에서 하는 행사인 줄만 알았는데, 그리하여 문득 해외여행처럼 한 번쯤은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도서전 관련 뉴스들을 보아하니, 그런 마음마저 싹 사라져 버렸다.(2023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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