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월의숲 2023. 10. 3. 23:25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 진은영, 「가족」 전문(『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수록)
 
 
추석 연휴가 지나갔다. 이번 추석은 아주 길게도 아주 짧게도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늘 그랬지만, 이번 추석은 유난히 길고도 짧았다. 나는 시월이 되자마자 감기에 걸려 골골거렸다. 나는 모든 것을 잊고 그저 쉬고만 싶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었고, 어쩔 수 없이 연휴 내내, 감기에 걸렸든 그렇지 않든, 내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가족이라는 - 생각해 보면 한없이 이상하기만 한 - 제단에 바쳐야 했다. 누군가는 말하리라. 바치다니, 당신은 양처럼 태워 없어질 희생물인가? 아니, 가족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래, 나도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내겐 가족이라는 것이 한없이 이상하기만 한 굴레이자 서글픔이고, 우울이며, 고통이고, 짓누름이자 떨칠 수 없는 거북함이자, 유일한 사랑이자, 내 피와 살을 갉아먹는 벌레이자, 바쳐도 바쳐도 끝이 없는 이단의 제단인 것을 당신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만났다.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만나야만 했고, 그래서 만났다. 그렇게 만난 우리들은 늘 그랬듯 익숙한 고통과 슬픔 그리고 절망 속에서 눈물을 흘렸으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말들만 주고받았다. 서늘한 가을바람과 햇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고, 바다도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한 것들은 그저 잠시 우리들 곁에 머물다 금세 사라져 버리는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우리들의 생각은 그러한 자연의 치유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겉돌게 만들었으며, 그 모든 것들을 아무 소용없는 것으로 만들어, 오히려 허탈감과 좌절감만을 안겨주었다. 눈물을 흘린 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소리를 지른 들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내가 말했다. 스스로가 변해야 한다고. 내가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고.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딱 한 번만, 정말 딱 한 번만이라도 자식에게 단호해지라고. 그렇지 않으면 점차 너 자신이 더욱 힘들어질 뿐이라고. 너는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까. 
 
터놓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와 이야기하면 할수록 거대한 벽이 우리 둘 사이에 생겨났다. 그것은 대화를 하면 할수록 더욱 견고해질 뿐이고, 우리들은 그 사실을 너무나도 선명하게 깨달을 뿐이었다. 어떡하면 좋겠니. 너를 어떡하면 좋겠니. 나는 그 말만 되풀이했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더 이상의 과오를 저지르지 않기를. 훗날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기를.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미래가 현실이 되지 않기를. 표정이 일그러진 너는 말하리라. 당신은 올바른가? 당신이 하는 말이 다 옳고 정당한가?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네가 더욱 안타까울 뿐. 
 
감기 기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몸과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고, 슬픔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듯한 이 느낌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나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일뿐. 그리하여 나 자신이 전부가 아니라, 내가 하는 말이 나 자신에게 모순이 되지는 않는지, 상대방에게 충고랍시고 하는 말들을 내가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돌아보는 일임을. 그리하여 나도, 당신도 삶에 잡아먹히는 일이 없기를.

'어느푸른저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것  (3) 2023.10.15
어쩌면  (0) 2023.10.13
농담  (0) 2023.07.24
비오는 날 카페에서  (0) 2023.07.15
저마다의 항로를 갖고 있는 외로운 항해사처럼  (0) 2023.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