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검은잎

단상들

시월의숲 2023. 11. 3.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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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도 짧았던 추석 연휴가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그 사이 시월이 되었고, 나는 감기를 얻었다. 가족들이 모였다 흩어지고, 남은 것은 알 수 없는 서글픔과 우울뿐. 대화를 하면 할수록 느껴지던 너와 나 사이의 견고한 벽을 확인하고 경악했을 뿐.(2023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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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어떤 통로를 지나고 있다. 반팔옷을 입은 사람과 폴라티를 입은 사람을 동시에 보았다. 잘 때 이불을 덮으면 덥고 덮지 않으면 춥다. 햇볕은 따가운데 그늘에 있으면 시원하다. 이렇게 해야 할지 저렇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 자주 빠진다. 수상한, 계절의 어떤 통로를 지나고 있다.(2023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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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노벨 문학상은 내게는 생소한,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가 받았다. 인터넷 서점을 검색해 보니 네 권 정도가 나오는데 모두 e-book이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희곡 작가이자 산문 작가'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 아닌가. 이제 곧 그의 대표작들이 줄줄이 나오겠지만. 유명한 상을 받았다고 하니 아무래도 선정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는 유려한 말들로 엮인 선정 이유가 크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적은 없었지만,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목소리를 부여'했다는 찬사는 어쩐지 솔깃해진다.(2023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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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는 강의 시작부터 질문을 하라고 했다. 여행과 인문학에 대한 강의였는데, 강의를 하는 중에 계속 질문을 하라는 말을 반복했다. 나는 질문을 강요하는 강사를 처음 보아 당황스러웠다. 더 곤란스러웠던 것은 내겐 질문을 할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질문을 원하는지 질문해야 했을까? 나는 어떤 장소를 꼭 가봐야 할지,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그곳의 맛집은 어디인지, 어떤 코스로 걸어야 최상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던 것이다.(2023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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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일어난 일도 마치 아주 오래전에 일어난 일처럼 느껴지는 병에 걸린 듯하다. 모든 일들이 다 내게서 멀어진 느낌이.(202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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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할 때 차에서 듣는 음악은, 늘 같은 볼륨으로 틀어놓는데도 어떤 날은 너무 크게 또 어떤 날은 너무 작게 들린다. 그건 그날의 날씨나 소음 같은 외부적인 요인 때문일까 아님 변덕스러운 내 마음 때문일까.(202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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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이란 참혹한 것이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희랍 비극 배우의 장화를 신고 다양한 무대 의상 차림으로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면서 광적으로 신봉하는 대사들을 외워서 읊으며 누비고 다니는 그런 무대다. - 밀란 쿤데라, 『농담』 중에서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참혹하지 않을 수 있는가. 참혹하지 않다면 우리는 젊지 않은 것인가. 진정 우리가 참혹하지 않은 때는 언제인가. 젊음이란 참혹한 시절이 끝나면 또 다른 종류의 참혹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202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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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싫은 마음으로 일을 하면 늘 투덜거리게 된다. 그러니까 무슨 일을 할 때 말이 많아진다면 그건 하기 싫다는 뜻일 게다.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는 그런 것 같다. 오늘 내가 그랬으니까.(202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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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점심 식사 후 짧은 산책길에 아직 피어 있는 장미를 만났다. 나는 순간 기시감이 들어 지난 글을 찾아보았다. 그건 기시감이 아니라 실제로 내가 작년 봄에 겪은 일이었다. 그때는 봄이었고 지금은 가을이지만. 그때는 마른 장미였고 지금은 아직도 생생히 피어있는 장미지만. 이 가을의 장미가 겨우내 떨어지지 않고 마르면 내년 봄에 또 볼 수 있겠지. 작년에 찍은 사진 속 장미처럼. 물론 작년과 올해의 장미는 다르겠지만. 아직도 떨어지지 않고 피어 있는 장미 역시 지난봄의 안부를 전하는 것일까.

 

"올봄엔 무탈했습니다. 이번 가을도 부디 그러하시기를."(202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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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 젠킨스 감독의 <문라이트>가 나온 지가 벌써 7년 전이라니. 내가 이 영화를 본 지는 6년이 되겠구나. 정말 엊그제 본 것 같은데. 아직도 마지막 장면이 잊히지 않는데. 내 주특기는 망각이지만, 시간의 흐름마저 망각 속으로 흘려버리는 재주도 있는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멍하니 있다가 퍼뜩 놀라는 일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루키의 <스푸트니크의 연인>에 나오는 문장이 떠올랐다.

 

'외톨이로 지낸다는 건 비 내리는 저녁에 커다란 강 입구에 서서 많은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는 모습을 끝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와 같은 기분이야'

 

왜 그 문장이 생각났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202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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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꿈 이야기를 듣는(읽는) 일은 나를 설명할 길 없는 묘한 감정 상태에 빠트린다. 그 꿈이 불길하건, 슬프건, 알 수 없는 예감으로 가득 차 있건 간에. 그것이 꿈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부지불식간에 그 꿈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모든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그 세계로.(2023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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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만큼 힘든(혹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누구나 다 겪는 일이야'라거나 '너만 힘든 게 아니야'라는 말은 위안인가 비난인가. 때론 침묵이 최선의 선택지인지도. 아니, '때론'이 아니라 '언제나'일까.(2023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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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났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로서의 나'가 되고 싶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생각하는 밤.(2023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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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냈던데 뭐 할 계획이세요?"

"일단 늦잠을 잘 계획이고, 늦잠을 자고 난 후의 일정에 대해서는 그때 가서 생각해 볼 계획이에요."

"아... 하하, 좋은 계획이네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계획이죠!"(2023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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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다. 꿈에서 나는 미술관 같은 건물의 주위를 걷고 있었는데 걷다 보니 작은 다리가 나왔다. 다리 아래로 물이 흐르고 있었던가? 어쨌건 그 다리를 건너는데, 갑자기 시야를 가릴 만큼 무수히 많은 날벌레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문채 두 팔로 얼굴을 감싸며 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벌레들은 집요하게 내게 달려들었고, 급기야 내 입으로 몇 마리가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는데, 다행히도(?) 그때 잠에서 깨어났다. 잠을 깨고 난 뒤에도 꿈속에서 느꼈던 입속의 이물감이 한참 내게 남아 있었다. 너무나도 생생하게.(202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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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더 웨일》을 보았다. 영화에 대한 감상을 차분히 남기고 싶지만, 우선, 이렇게 감정이 복받치는 영화인지 미처 몰랐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하얀 화면에서 검은 화면이 나올 때까지 나는 왜 그리도 슬퍼서 한참을 울었던가?(2023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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