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검은잎

단상들

시월의숲 2023. 10. 7.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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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와 몸이, 거대한 바위에 묶인 채 한없이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고 있는 것만 같다. 무겁고 무겁다. 피로가 이렇듯 물리적인 실체를 가진 것이었던가? 책을 한 글자도 읽을 수가 없다. 도무지 어느 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다. 선선한 바람과 풀벌레 소리 가득한 9월의 밤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그런 와중에, 주문하고 나서 잊고 있던 책이 발송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하루키의 신간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과 배수아가 번역한 엘제 라스커 쉴러의 『우리는 밤과 화해하기 원한다』. 그 문자가 내게 아주 잠깐의 설렘을 가져다주었으나 그뿐이었다. 나는 어서 내 몸과 화해하기를 원한다.(2023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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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왔다. 진정한 가을이 시작되었다,라고 말하려니 갑자기 낯이 간지럽다. 그냥 이렇게 말하련다. 책과 함께 나만의 가을이 시작되기를 바란다고. 이러나저러나 낯간지럽긴 마찬가지지만. 아무튼 책이 왔다. 가을도 왔다. 적어도 아침저녁으로는.(2023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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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기억하지 못하다가 누군가의 말로 인해 불현듯 어떤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다. 하지만 그 기억이란 정말 내 기억이 맞는가? 그것은 상대방의 말로 인해 떠올린 상상 같은 것은 아닐까?(2023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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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쓰는 것 말고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나오는 문장이다. 나는 그 문장을 읽고 그러한 상태 - 편지를 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 에 대해서 생각한다. 답이 없는, 그 막막한 고독에 대해서.(2023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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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에 물든 구름이 마치 산 너머의 산처럼 보였다. 하늘에 두둥실 떠있는 구름이 아니라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는 부드러운 솜이 마치 산처럼, 푸른 산 뒤편에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산을 내리누르고 있는 듯 보이는 구름을 보면서 퇴근하는 길이 새삼 특별하게 느껴졌다.(2023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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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출근을 할 때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논의 색깔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벼들은 자신이 할 일을 어김없이 해내고 있는 것이다. 묵묵하게(하지만 돌아보면 어느새).

 

누군가 내 삶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 거창한 물음에 대답을 못하고 말았지만(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저 벼들처럼 되는 것이라고 말할 걸, 생각했다. 그저 자신 앞에 놓인 일을 묵묵히 하는 것. 들판이 노랗게 물들면 가을이 온 것임을 자연스레 알게 되듯이.(202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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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누군가와 연결(?)해 주고자 자처하는 이들의 심리는 무얼까. 왜 어떤 이들은 싱글인 사람에게 짝을 지어주지 못해 안달하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무례한 일이 아닌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202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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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어떤 물건을 전해주기 위하여 간 -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의 장례식장 - 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상주와 인사까지 하고, 앉아서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온 일에 대하여.(2023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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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알고 있어요. 너무나도 잘. 당신이 나를 아주 많이 생각하고 있다는 걸. 하지만 그 마음이 나를 또 힘들게 한다는 걸 당신은 모르겠지요. 당신은 나만의 시공간을 아무렇지 않게 침범하고도 무엇이 문제인지 모른다는 걸. 아니, 몰라야 하겠지요. 당신은 영원히 몰라야 합니다. 고통은 오롯이 나만이 감내하면 되니까요. 당신이 만약 내 이런 심정을 안다면 나는 더 큰 고통에 몸부림치며 머리를 쥐어뜯겠지요. 그래요, 아직은, 아직은 괜찮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추석이라는 긴 연휴를 잘 견뎌내 봅시다. 당신은 영원히 알 길 없는(없어야만 하는) 나만의 애증 속에서.(2023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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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함을 편함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편할수록 선을 지키기가 힘들기 때문일까.(2023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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