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검은잎

단상들

시월의숲 2023. 12. 28.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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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가 보이지 않은 사람에게, 내가 쓴 글을 읽어주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다. 마치 내가 쓴 글이 아닌 것만 같은, 낯설고도 어색한 그 낭독의 순간. 미묘한 공기의 떨림과 서서히 밀려오는 어떤 슬픔의 눈으로 나는 그들을 바라본다. 가만히 듣고 있는 내 아버지를 본다.(2023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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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 어딘가에 스위치가 있어 켜고 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와 비슷한 구절을 어디선가 읽은 것도 같은데. 일을 할 때는 일만 생각하고 퇴근하고 나서는 일에 대한 생각은 단 1초라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스위치가.(2023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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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한 말들이 상대방에게는 정반대로 느껴지는 순간에 대해서 생각한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희미해질 무렵, 상대방이 내가 한 말에 대해 따지고 들 때,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정말이지 아찔하고, 무서운 순간이 아닌가.(2023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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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따갑다. 어둠 속에서 가로등과 네온사인 불빛이 빗물에 뭉개지고 지워진다. 안경을 쓰고 있는데 안경을 벗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손으로 더듬더듬 물건을 찾듯, 모든 사물이 형체를 잃어가는 빗길을 헤집고 집으로 돌아온다. 와해되지 않기 위해. 빗소리는 여전히 따갑고.(2023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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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떨 때는 잠이, 마치 육중한 무게를 가진 돌처럼, 물리적 실체를 가지고 나를 내리누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기절하듯 잠에 빠져드는데, 깨고 나면 한동안 알 수 없는 불쾌감이 앙금처럼 남아 있는 것이다.(2023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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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이 부르튼 사람을 보면 내가 다 아프다. 그 고통이 마치 내게로 전이되는 것 같아서. 그것은 마치 한 사람이 지닌 내면의 고통이 터져 나온 것만 같은 것이다.(2023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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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이 되자마자 출퇴근 길의 음악을 캐럴로 바꾸었다. 계절을 타는 음악이므로 지금 실컷 듣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캐럴을 듣고 있으니, 같지만 다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캐럴이란 것이 결국 하나의 곡을 다양하게 변주한 것이 아닌가.

 

참으로 여러 가수들이 여러 장르로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캐럴을 부르고 있었다. 어쩌면 모든 예술들이 다 그런 건 아닐까? 사랑이라는 것을, 고통이라는 것을, 슬픔이라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요컨대 문제는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인 것이다.(2023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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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술을 마셨고, 했던 이야기를 또 하며 웃었다. 마치 만나기 위해 만나는 사람들 같았다. 늘 그랬듯 K는 술을 많이 마셨고, S는 거의 마시지 않았다. 호프집은 너무 시끄러웠고 나는 그들의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술을 많이 마신 K는 계속 외롭다고 말했다. 농담이라고 말하면서도 계속 외롭다고 말하는 그를 보며 나는 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했지만, K는 듣는 것 같지 않았다. 너의 외로움을 내가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있겠니. 나는 내 외로움만으로도 이미 벅찬걸. 나는 말대신 술을 건넸다.(2023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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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에 카모마일 티가 있길래 이건 뭐지? 하고 유통기한을 봤더니 2021년 5월 11일까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2023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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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눈을 떴다. 항만이라서 그런지 파도가 잔잔해 얼핏 커다란 강처럼 보이기도 했다.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었으나 구름에 가려져 있었고, 바다 위에는 새들이 무리 지어 앉아 있었다. 걱정은 뒤로 하고 일단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자, 고 다짐했다.(20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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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국어사전에 '서글프다'란 단어를 찾아보니, '외로워 불쌍하거나 슬프다'라고 나와있다. '슬프다'는 '서럽거나 불쌍하여 마음이 괴롭고 아프다'로, '구슬프다'는 '처량하고 슬프다'라고 나온다. 장시간 차를 타고 오면서 오늘같이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의 내 마음은 어떤 모습인가 생각했다.(20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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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운전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뭔가 희끗한 것이 날리더니 순식간에 눈보라가 몰아쳤다. 그러더니 갑자기 태양이 비췄고, 하나의 하늘에 햇빛과 눈보라가 동시에 나타났다. 땅은 어제 내린 비로 아직 축축했다. 마치 모든 날씨들이 서로 하나가 되려는 듯 보였다.(202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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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밤의 얼굴들. 차갑다는 말조차 차갑게 들리는.(202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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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문득 떠오르는 단어들, 문장들, 생각들. 무언가, 어딘가, 누군가에게서 촉발되는 것 같지만 그 어느 것도 확신하지 못하는, 생각의 편린들. 마치 모래성을 쌓듯. 영영 사라져 버린 것인지, 어딘가로 스며든 것인지 알 길이 없는.

 

그렇듯 문득 떠오르는 것들에 대해서 쓰려고 했지만, 때로는 쓰기 위해 무언가를 애써 떠올리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아무 의미 없는 일들, 무용한 몸짓과 표정들. 내 비참을 확인할 뿐인(그것으로 충분한가?). 하지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내면의 어떤 충동이 들끓는.(202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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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들이 나를 살게 한다. 그 시간들은 내겐 생존의 필수요소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충전되고, 충전됨으로써 나는 또 이 모든 소란들, 괴로움들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나를 이해할 수 있겠니? 불쑥 쳐들어온 무도한 침범자들이여!(202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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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밀레이의 시집 『죽음의 엘레지』가 복간된다는 소식을 인터넷에서 보았다. 그리고는 읽고 있던 메이 사튼의 책을 다시 펼쳤는데, 거기 빈센트 밀레이가 나온다. 저자는 한 그리스 신화를 이야기하면서 그녀의 시 <계곡의 안개>를 떠올린다. '인생은 기껏해야 도요새 울음보다 길지 않은 것을'

 

그 모든 것들은 최승자 시인으로 연결되어 있다. 빈센트 밀레이의 시집도, 메이 사튼의 일기도 모두 최승자 시인이 번역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은 우연인가? 우연의 얼굴을 한 모종의 이어짐인가?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은 결국 빈센트 밀레이의 시집을 사라는 말일 것이다.(202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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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여기는 화창한 크리스마스, 누군가에게는 즐거운 크리스마스, 내게는 조용한 크리스마스. 모두가 즐거운 날이면 좋으련만 나는 또 내 이기심 때문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 나는 그저 평온하길 바랐는데! 물론 이건 크리스마스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2023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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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일간의 연휴가 마치 하루 같다. 나는 다행히도 혼자 있을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정신과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혼란스러움은 혼자 있는다고 나아지는 것이 아니고, 평온함은 때로 사람들과의 부딪힘 속에 있기도 하다는 것을 조금 알 것도 같았던, 삼 일간의 휴일.(2023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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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새해를 맞는 방법은 이것이다. 언제 읽을지도 모르는 책들을 사는 것. 사서 책장에 꽂아놓고 바라보는 것. 그리하여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언제 샀는지도 모를 그 책들을 우연히 꺼내 읽는 것. 마치 알 수 없는 통로로 그 책이 내게 온 것처럼.(2023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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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동갑이라는 것의 의미에 대하여. 혹은 어리거나 나이가 많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2023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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