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하나코는 없다

시월의숲 2024. 3. 25. 22:30

한국인이 한국어로 쓴 소설을 읽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한국 소설가의 작품을 많이 읽지 않았던가? 무엇이 다시금 나를 순수한(?) 한국 소설에 이끌리게 한 것인가? 한동안 외국 작가의 번역된 소설만 읽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번역투의 문장이 주는 압력(?)에 얼마간 지친 것인지도(내가 그런 문장들을 유별나게 싫어하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좋아하기까지 하면서도). 하지만 심신이 지칠 만큼 외국 소설에 빠졌던 적이 있던가? 나는 대답할 수 없다. 무언가에 탐닉한다는 것, 중독된다는 것은 내게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대학시절 어떤 교수님이 내게 말했다. "너는 종교를 가지면 안 될 것 같구나." "왜요? 교수님?" "내가 보기에 네가 신을 믿는다면 맹신에 빠질 위험이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교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무엇 하나 진득하게 하지 못하는 내가? 나는 그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묻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며 신기해했을 따름이다. 아니다. 어쩌면 나는 그때 교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아, 나는 신조차도 쉽게 믿을 수 없는 저주에 빠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으니. 그때부터 나는 일종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나는 종교에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오로지 그 이유로 어떤 신도 나를 범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일까? 교수님은 나를 완벽하게 오해하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확실히 안다. 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 아니다. 혹은 아직 그런 종류의 인간이 되지 못했거나. 

 

아, 이런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저 한국인이 한국어로 쓴 한국 소설을 읽었고, 그것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세상에 나와 있는 수많은 소설 중에 내 책장에 꽂혀 있는, 아직 한 번도 꺼내보지 않은 한 권의 책에 대해서. 그 책의 이름은 『회색 눈사람』이고 작가의 이름은 최윤이다. 이 책은 그의 중단편 선집이다. 90년대 활동했던 작가인데 이제야 나는 그의 소설을 읽는다. <하나코는 없다>라는 단편이 눈에 들어온다. 그 소설은 현대인의 익명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익숙하다 못해 식상해진 '익명성'이라는 단어.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나는 너를 아는가? 내가 너와 만나고, 술을 마시고, 즐겁게 이야기를 하지만, 너는 결코 너의 개인적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나 또한 굳이 캐묻지 않는다. 어른이 되어 만난 너는 그렇다 치더라도, 어렸을 때부터 만나왔던 동창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나와 오랜 시간 함께 해왔지만, 그리하여 정기적으로 만남을 가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져서도 만남은 계속 이어지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리들은 서로를 안다고 할 수 있는가. 뭐 그런 이야기. 이상하지. 식상할 것만 같던 이야기가 왜 내 마음 한 켠을 건드리는 것인지. 우리는 가족이라 하여 서로를 잘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오히려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더욱 오해하고 있지는 않는가. 서로를 잘 안다면, 그 수많고 불필요한 오해들에 서로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닌가? 나는 인간들 간의 소통 불가능성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우리는 결코 서로를 모른다. 그 사실은 전혀 식상하거나 진부하지 않다. 진부하기는커녕 그 깨달음은 차갑게 내 깊숙한 곳을 찌른다. 잊고 있던 차가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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