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대학시절

시월의숲 2024. 2. 28. 21:38

버스엔 자주 빈자리가 없었다

천장에 달린 동그란 손잡이를 동아줄처럼 잡고

한 시간 넘게 흔들리던 버스에서 내리자

바닥이 출렁거렸다

 

강의실 의자에 앉자마자 잠이 들었다

잠은 무서운 중력으로 나를 짓눌렀고

나는 그것이 단순히 멀미 때문인 줄 알았다

 

천 원짜리와 이천 원짜리 중에서 고민하다가

버스비와 책값을 셈해보곤 천 원짜리 학식을 먹었다

건더기가 없는 맑은 국과 신 김치를 앞에 두고

나는 늘 예기치 못한 묵상에 빠졌다

 

게릴라 같은 통증이 수시로 나를 엄습했다

아프긴 아픈데 어떻게 아픈지 설명할 길이 없어

병원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설명할 길 없는 것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만 멀뚱멀뚱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알 수 없는 불길함으로 검게 젖어들던

그 시절의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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