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간다

시월의숲 2024. 7. 8. 23:47

 
 
"질투는 썩는 것처럼 끔찍한 감정이지. 속을 다 꼬고 뒤집어 놓거든. 그게 얼마나 아픈지 난 알아. 인생을 쉽게 사는 사람을 보면 그런 감정이 느껴지거든. 왜냐면 사실... 난 좋은 사람이 아니니까."
 
- 타이 웨스트 감독, 영화 《펄》 중에서
 
 
*
공포영화가 보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들자 최근에 공포영화를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무언가에 집중할 수 없는 날들이지만, 그래서 더욱 공포영화여야만 했다. 영화 속 공포로 현실에서의 내 정체 모를 두려움을 누르고 싶었다. 잠시나마 잊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타이 웨스트 감독의 <펄>이라는 영화였다. 제대로 된 선택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가 공포스럽지 않았다는 게 아니다. 다만 내가 원한 공포는 보다 날이 서고, 감각적이며, 잔인해야만 했는데, 이 영화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뭐랄까, 이 영화는 예상과 달리 더 영화 같은 영화였달까? 영화를 보고서 무슨 영화 같은 영화 운운하느냐고? 그러니까 이 영화는 마치 오래된 영화임을(고전 영화임을) 표방하는 영화였다. 그 방식은 현대적인 유머러스함과 B급 감성이 혼재된, 공포영화 같지 않은 공포영화였다고 해야할까. 스릴러와 공포 사이의 중간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지만, 어쨌든 재미가 없지는 않았다.
 
슈퍼스타가 꿈인 시골 소녀의, 자신의 꿈에 대한 광기 어린 집착이 주제였는데,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것들로부터 벗어나고픈 주인공의 마음에 감정이입을 하다가도 그것이 광기로 치닫는 부분에서는 시원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영화는 그 양상을 극단적으로 그리고 있지만, 그게 어디 영화만의 이야기던가? 우리는 그 아슬아슬한 선을 어떻게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지 아찔했다.(이건 실로 무서운 이야기이려나?)
 
주인공 펄 역을 맡은 미아 고스의 연기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는 그녀의 원맨쇼나 다름없으니까 말이다. 그녀의 연기를 보면서 순수와 광기는 동전의 양면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영화가 굉장히 연극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건 극 중 펄이 자신의 시누이에게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줄줄이 말하는 부분이 연극에서의 독백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영화는 마지막에 주인공 펄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꽤 오랜 시간 보여준다. 나는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살인 장면에도 불구하고 그 마지막 장면이 제일 섬뜩했다. 그 해맑고, 광기에 찬, 슬프기도 하지만 선을 넘어버린 자의 허탈함과 대담함, 질투와 사랑과 증오의 감정들이 그 얼굴에 다 들어 있었던 것이다.
 
영화를 재밌게 본 것과는 별개로, 나는 영화를 잘못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전기톱 살인마 같은, 단순한 잔인함을 원했던 것이다(이건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가 마음에 든다. 어쨌든 카니발은 끝났다.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현실에서의 나는 아직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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