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간다

공작

시월의숲 2024. 10. 5. 00:00

 
파블로 라라인이라고 하는 칠레의 영화감독이 만든 뱀파이어 영화 《공작》을 보았다. 감독 이름이 생소하여 필모를 찾아보니, (아직 보지 못했지만) 《스펜서》와 《재키》의 감독이기도 했다. 어쨌든 뱀파이어 영화라는 것만 알고 보게 된 이 영화는 생각보다 독특했고 때로 우아했다. 흑백 영화이기에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면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가 흡혈귀라는 설정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역사에 대한 우화(풍자극)라고도 할 수 있다. 영화 속에서 이백오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시대를 풍미하며 살아온 그가 죽음을 결심하지만 결국 흡혈귀라는 본성에 따라 다시 피와 심장을 갈아 마시며 생명을 이어간다는 이야기다. 수많은 학살과 부정부패를 저지르며 부유하게 살던 피노체트, 결국 돈 때문에 그를 죽이려 드는 자식들, 하인과 바람이 난 그의 부인, 흡혈귀를 처단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결국 그의 힘 앞에 굴복하게 되는 수녀 등 여러 인물들이 어우러져 영화는 한 편의 독특한 우화가 된다. 정말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빨고 심장을 뜯어먹으며 연명하는 짐승인 흡혈귀가 아니라면, 어찌 그러한 독재자가 될 수 있었겠는가, 묻고 있는 것 같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흡혈귀가 사냥을 위해 허공을 날아다닐 때 박쥐로 변하지 않고 그저 인간의 모습으로 망토를 걸친 채 날아다닌다는 점이었고, 생식능력이 없다고 알았던 흡혈귀에게 자식들이 있다는 것, 환한 대낮에도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그 점을 무화시키기 위해 흑백으로 찍은 걸까?), 젊은 여인의 피와 심장을 먹을수록 더욱 젊어진다는(이건 익숙한 설정일지도 모르겠다) 점이었다. 망토를 휘날리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흡혈귀의 모습은 흡사 드니 빌뇌브의 《듄》에서 하코넨의 병사들이 우주선에서 지상으로 내려올 때나 혹은 산 위로 올라갈 때의 모습처럼 우아해 보이기까지 했다(특히 흡혈귀가 된 퇴마사 수녀가 환희에 찬 몸짓으로 지상을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라).
 
자살한 흡혈귀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가? 흡혈귀에게 죽음이란 타인에 의해 가슴에 박히는 말뚝 밖에는 없는 것 같다. 죽음을 결심한 피노체트도 결국은 죽지 못했으니까. 흡혈귀에게 본성이란 살아남는 것일 게다. 영생을 누린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뱀파이어들에게 축복이자 형벌이 아닐는지. 그런데 만약 피노체트 같은 자들이 살아남아 이 세상에 흡혈귀처럼 영생을 누린다면 그만큼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아, 세상은 이미 끔찍할 대로 끔찍한 곳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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