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검은잎

단상들

시월의숲 2024. 12. 31.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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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익명의 시골 익명의 마을에서 익명의 여자와 익명의 사랑을 나누어 역시 익명의 가족을 이루고 익명의 인물들을 모아 새로운 익명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 에밀 아자르, 《가면의 생》 중에서

 

익명의 세계에서 익명으로 한 사람으로서 알려지고 싶은 욕망이란 것이 말이 되는 말인가? 가끔 익명의 세계와 익명이 아닌 세계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 간격에 대해서.(202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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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뭘 먹던지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음식을 많이 먹는다는 말이 아니라, 조금일지라도 내가 먹는 음식의 성분이(딱히 뭐라 설명할 순 없지만) 과하다는 느낌이. 한강의 《채식주의자》나 〈내 여자의 열매〉의 주인공의 시작이 이랬을까? 물론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말이다.(2024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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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묻는다. 어디로 가고 싶냐고. 그것을 묻는 시기가 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오라 해서 왔고, 가라 해서 갔을 뿐. 여기나 거기나 내겐 매 한 가지다. 이곳에도 고통과 기쁨이 있고, 저곳에도 고통과 기쁨이 있을 것이기에.(2024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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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페소아의 리스본처럼, 배수아의 독일이.(2024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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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신중하게 말할 수 있을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신나게 떠들고 나면 갑작스레 씁쓸함과 후회의 감정들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말을 안 할 수는 없고, 말을 하자니 실수를 하고. 말조심을 하자는 생각은 늘 말을 하고 난 뒤에 든다. 이처럼 난감한 일이 또 있을까.(2024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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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차가운 계절에 이토록 뜨거운 심장이 뛰고 있다니.(2024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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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자꾸만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2024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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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원래부터 그런 것은 없지 않았나.(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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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포영화를 좋아하지만, 사실 〈그것이 알고 싶다〉 보다 무서운 건 없는 것 같다.(2024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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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라고 크고 작은 송별회에 참석해야만 하는 일이 마치 지난한 고난의 행군처럼 느껴진다. 그것도 사회생활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건 지치는 일임에는 틀림없다.(2024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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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되지 않는 말을 자꾸 들어야만 하는 것 또한 속이 터지는 일이다. 전 국민이 울화병에 걸릴 지경이 아닌가.(2024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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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의 아니게 《하얼빈》 전도사가 된 듯하다.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 영화를 볼까 말까 고민 중이었던 몇몇 이들이, 영화에 대한 내 감상을 듣고는 보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우는 걸 보면. 아, 물론 영화에 대한 감상은 각자 자신의 몫이겠지만.(2024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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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을 내란이라 부르지 못하는 일부 집단의 광기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정신 상태가 의심스러울 지경이나, 그것이 저들의 유구한 생존본능이라고 한다면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하지만 저 말도 안 되는 공해를 듣고 있어야만 하는 시민들의 정신 건강은 어떻게 할 것인가.(2024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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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쩌면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실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2024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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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마음이란 뭘까. 그것은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놓을 수 없는 마음 같은 걸까. 당신을 걱정하는 내가 아니라, 당신이 걱정하는 내가. 자식을 향한 단념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나는 결코 알지 못할 그 마음이란.(2024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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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동생의 생일이었는데, 동생이 나에게 선물을 했다. 요즘 너무 힘이 없어 보인다고, 힘을 내라고 하면서.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2024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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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하다. 마치 2024년에 미처 오지 못한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온 듯하다.(2024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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