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간다

하얼빈

시월의숲 2024. 12. 25. 22:40

 

 

'불을 들고 어둠 속으로 걸어갈 것이다'

 

우민호 감독의 영화 《하얼빈》은 안중근의 저 대사로 끝난다. 하지만 끝이 아니라 시작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지금 대한민국 역시 혼란한 시국이어서 그럴 것이다. 나는 감독이 저 대사를 위해서 이 영화를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른 영화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영화는 특히나 아쉬움과 열광의 가운데 있는 느낌이다. 누군가는 《명량》이나 또 다른 안중근 영화인 《영웅》, 《남한산성》을 언급하면서 이 영화의 포지션을 가늠하기도 한다. 나 역시 영화를 보고 난 후 그 영화들이 떠올랐다. 분출되는 감정의 양으로 보자면 제일 위에  《명량》이, 중간에 《남한산성》 이, 제일 아래에 《하얼빈》이 놓여 있지 않을까. 그만큼 이 영화는 관객의 감정을 크게 동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힌다.

 

단순한 스토리에 비해 영상은 아름답고 웅장하기까지 하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이상한 추위를 느꼈다. 그것은 실제로 영화관이 추웠기 때문은 당연히 아니다. 스크린을 뚫고 나오는 겨울의 차가운 이미지들이 내 오감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영화의 영상미는 압도적이다. 어떨 때는 불필요하다 느껴질 정도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자칫 위대한 인물이기에 빠질 수 있는 무절제한 감정 이입은 최대한 덜어내고, 대신 단순한 이야기를 단순하지 않게 보여주기 위한 시각적 이미지들은 최대한 드러내고자 했다고. 이건 칭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평가는 달라지는 거니까.

 

그럼 나는 어땠냐고? 영화가 의도한 바는 충분히 알겠다. 소위 영웅이나 독립투사를 그린 영화들이 빠지기 쉬운 감정 과잉이 - 다른 말로 신파가 - 이 영화에는 거의 없었다. 감독은 어쩌면 그때 그 역사를 뜨겁게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차갑게 접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에도 어둠은 계속되고 - 오히려 더 짙어지고 - 안중근의 의거는 끝이 아니라 지난한 투쟁의 발화점 혹은 그가 마지막에 말한, 어둠 속으로 걸어갈 때 필요한 '불'이 되기를 바랐기에 그랬는지도. 이 영화가 그리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 '차가운 열정'이 아니었을까? 아쉬웠던 점은 앞서도 말했듯이 러닝 타임에 비해 이야기가 너무 단순하다는 것이다. 인물들을 차갑고 건조하게 그려낸다고 해서, 스토리가 납작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내게 이 영화를 다시 볼 의향이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봄날은간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키드  (0) 2024.11.23
룸 넥스트 도어  (2) 2024.10.27
조커: 폴리 아 되  (0) 2024.10.09
공작  (0) 2024.10.05
베테랑 2  (0) 2024.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