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영화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였다. 영화의 매 장면이 다 미술관에 걸려 있는 초상화요, 풍경화요, 정물화처럼 느껴졌다. 몇 명 되지 않는 등장인물과 군더더기 없이 말쑥한 영화 속 배경과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주인공의 직업인 화가라는 설정과 어우러져 영화 전체가 하나의 움직이는 그림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영화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닌가? 원래부터 움직이는 그림을 영화라고 부르지 않는가? 물론 활동사진이 더 맞는 표현이겠지만 말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이 그린 이 그림은 그저 그림은 당연히 아니다. 이상한 말 같지만 나는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겠다. 이 그림은 영화 속에서 마리안느가 그린 엘로이즈의 초상화처럼, 서서히 곁에 다가서게 되는, 관찰이 곧 사랑의 시선으로 바뀌게 되는, 그 시대, 그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으로 뻗어나간, 두 여성의 현실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려는 이야기와 그것을 담아내는 화면은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선명하며, 질척이지 않고, 현실적이기에 강렬하다. 하지만 그 강렬함은 동적이지 않고 정적이다. 뭐랄까... 정적인 격정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은 그들의 사랑이 여러모로 억압적인 상황 하에 놓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중후반 쯤, 세 명의 등장인물이 모여 책을 읽으며 이야기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엘로이즈가 읽어주는 책의 내용은 다름 아닌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의 이야기였다. 신화 속 그 이야기가 두 주인공들의 처지와 묘하게 겹쳐지면서 영화에 깊은 인장을 남긴다. 좀 긴 듯 하지만 주인공들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 같아 인용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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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라 줄을 튕기며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오, 모든 망자의 집이자 저승을 주관하는 자들이시여. 제 아내를 찾고 있습니다. 그녀는 독사에 물려 젊음을 도둑맞았습니다. 간청하오니, 너무 일찍 끊긴 운명의 실을 고쳐주소서. 모든 것이 당신의 것. 우리가 모두 향하는 인간의 마지막 안식처인 이곳의 오랜 지배자시여, 아내도 존재의 기한을 마치고 무덤에 들어가면 당신 것입니다. 운명이 아내를 저버리면 전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우리들의 죽음을 기뻐하소서."
"설득력 있네요."
"아주."
"잘 되면 좋겠어요."
"처음으로 노래에 설득된 에우메니데스의 눈물이 그녀의 뺨을 적셨다. 그 기도를 내치지 못한 저승의 신과 부인은 에우리디케를 불렀다. 그녀는 갓 죽은 영혼들 사이에 있다가 다리를 절면서 천천히 다가왔다. 오르페우스는 끝까지 뒤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그걸 어기면 끝이다. 두 사람은 짙은 정적 속에서 가파르고 자욱한 안개로 뒤덮여 어두운 길을 걸어갔다. 이승과 그리 멀지 않은 저승 끝에 다다랐을 때 아내를 잃을까 봐 겁났던 오르페우스는 못 참고 고개를 돌려서 그녀가 뒤에 오는지 봤다. 아내는 팔을 뻗어 남편을 안으려 했지만 그 안타까운 손은 허공만 잡을 뿐. 다시 죽은 그녀는 남편을 탓하지 않았다. 사랑이 무슨 죄겠는가?"
"끔찍해요. 남자는 왜 돌아봤대요?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잖아요?"
"이유야 있죠."
"그래요? 다시 읽어 주세요."
"이승과 그리 멀지 않은 저승 끝에 다다랐을 때 아내를 잃을까 봐 겁났던 오르페우스는 못 참고 고개를 돌려서..."
"아니죠. 잃을까 봐 겁났다는 건 이유가 안 돼요. 하지 말라고 했는데!"
"사랑에 미친 거지. 어쩔 수 없었던 거야."
"소피 말도 맞아요. 참았어야죠. 이유야 어찌 됐든. 선택했을 수도 있고요."
"무엇을요?"
"그녀와의 추억을요. 그래서 뒤돌아본 거예요. 연인이 아닌 시인의 선택을 한 거죠."
"그녀는 그에게 닿을 수 없는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다시 저승으로 내려갔다..."
"...여자가 말했을 수도 있죠. 뒤돌아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