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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들

*길을 걷다가 내 머리 위로 날아가는 까치의 배를 보았다. 이제 춥다는 말은 유통기한이 지난 말처럼 느껴진다.(20250313)  * 오래전에 '우주의 원더키디'라는 만화가 있었는데, 제목 앞에 연도가 붙어 있었다. 나는 그것이 분명 2025년이라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2020년이었다. 그러니까 그 만화의 제목은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였던 것이다. 뭔가 크게 예상을 벗어난, 상상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 같다.(20250315)  * 직장 동료의 문상을 하러 가서 나는 무슨 말을 그리도 지껄였을까. 영정사진 앞에서, 향은 불이 잘 붙지 않아 당황스러웠고, 급격히 떨리는 손으로 겨우 불을 붙인 향이 향로에 잘 꽂히지 않아서 더욱 당황스러웠던. 나는 그곳에서 오래 준비한 죽음과 갑작스러운 ..

입속의검은잎 2025.04.01

개 이전에 짖음

이 산책로는 와본 적이 없는데 이상해.다정한 편백나무들 그림자들 박쥐들가지 않은 길에서 길을 잃어본 적이 있어요?만나지 않은 사람과 헤어진 적은? 어제는 죽은 사람과 함께 걸어갔는데마치 죽지 않은 사람처럼 그이가 내 팔짱을 끼었는데내 팔이스스르 녹아갔는데 기억하나요? 여기서 우리는 보자기를 바닥에 깔고 앉아 점심 식사를 했었잖아요. 보자기라니 정말 우스워. 식빵에 잼을 발라 먹었죠. 오래전에 죽은 강아지 이야기를 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는데 대낮이고 사방이 캄캄하고 처음 보는 길이었지. 길을 잃기에 좋은 길이었다. 이미 죽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가 왈왈, 짖고 싶은 기분이었다가 아마도 나는 당신의 미래의 오후의 꿈속에조용한 기억에 담긴잼 같은 것인가 봐요끈적끈적 흘러내리나요.달콤한가요. 강아지 한 마리가 왈왈..

질투는나의힘 2025.03.30

고병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린비, 2011.

책은 민주주의와 같다. 그것은 하나의 이견이다. 뭔가를 제안하든 반박하든 책은 차이를 표방한다. 따라서 책을 쓰는 일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민주주의를 실천한다.(4쪽)  *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변치 않는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비판일 것이다. 비판이란, 그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일 때조차, 민주주의자의 의무에 가까운 특권이다. 민주주의가 더 이상 사랑할 만한 것이 되지 못했을 때, 민주주의자는 민주주의와 대결함으로써 민주주의를 구해야 한다. 진리에 기댐으로써가 아니라 진리를 의심함으로써 우리는 진리에 대한 사랑을 표하지 않던가.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5쪽)  *  민주주의에는 확실히 다른 정체들에서는 볼 수 없는 원리상의 난점들이 있다. 가령 민주주의에서 데모스는 통치자이..

아무것도 아닌 자의 상상

한결같은 단조로움, 지루하고 똑같은 일상, 어제와 오늘의 결코 다르지 않음, 내가 살아 있는 한 이것은 나를 영원히 떠나지 않으리라. 그 덕분에 내 영혼은 생생하며, 작은 것들이 주는 자극을 크게 느낀다. 우연히 눈앞을 날아가는 파리 한 마리에 즐거워하고, 어느 거리에선가 간간히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흥겹고, 사무실 마감시간이 다가올 때의 엄청난 해방감, 그리고 휴일이면 끝없는 평안과 휴식을 만끽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되는 나 자신을 상상할 수 있다. 내가 실제로 뭔가 대단한 존재였다면 나는 그것을 상상할 수가 없으리라.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이어서 페소아는 썼다.  "보조회계원은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꿈을 꾼다. 하지만 영국 왕은 그런 꿈을 꿀 수..

불안의서(書) 2025.03.29

민주주의를 시작하다

한 때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이 유행한 적이 있다. 제목의 물음은 책의 유행을 지나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처럼 보인다. 아니, 그것은 시대를 떠나 늘 물어야 하는 질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책이 유행할 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 책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당시 뉴스를 틀면 정치인 혹은 언론인이라고 하는 자들은 앞다투어 정의를 내뱉었고, 그것은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을 오히려 떨어뜨리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모두 '자신만의 정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들었던 정의에 대한 말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정의'라는 말이 오염되었다는 것이었다. 오염된 정의라니! 우리는 얼마나 정의롭지 못한 사회를 살고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까지도..

흔해빠진독서 2025.03.24

모르는 사람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받았다. 초등학교 동창 누구라고 했다. 이름이 익숙하긴 한데 얼굴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동창회 모임을 하는데 나오라는 이야기였다. 밴드로 붙여 놓은 것처럼 초등학교 때의 기억은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니. 다 모르는 사람들일 뿐인데. 나는 그와의 대화가 점차 두려워졌다. 다른 동창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설마 그럴 리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아는 사람들과 만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과거 속의 나와 굳이 대면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20240421)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니. 다 모르는 사람들일 뿐인데.  오늘도 동창회에서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며..

어느푸른저녁 2025.03.22

EBS 다큐프라임 〈민주주의〉 제작팀·유규오 지음,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16.

여러분은 정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정치학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한 설명에 따르면, "정치란 사회적 가치, 즉 희소한 자원의 권위적 배분"입니다. 이 말은 정치권력을 누가 갖고 있으며 어떻게 행사하는지에 따라 배분도 달라진다는 얘기입니다.(19쪽)  *  시민들 스스로가 자원 배분에 대한 통제력을 갖겠다는 이상,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19쪽)  *  선거가 아닌 추첨, 이것이 바로 아테네식 민주주의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테네 시민들은 왜 추첨을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장치로 활용했을까요? 아테네 시민들은 통치자가 일반 시민들과 분리되어 계속 통치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는 통치하는 것과 통치 받는 것을 번갈아 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양자경 주연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개봉할 때 보고 싶었지만 보지 못했다. 내가 사는 곳의 영화관에서는 개봉을 하지 않았거나 해도 아주 극소수의 개봉관에서만 했을 것이다(대부분 내가 보고 싶어 한 영화들은 그랬다). 물론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거나 발품을 팔았다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게으르고 게을러서, 보고 싶은데 개봉하는 곳이 별로 없구나 하면서 무심히 넘겼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엔 극장 개봉을 놓치더라도 볼 수 있는 루트가 아주 많으므로, 단지 시기의 문제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시기의 문제에 나는 늘 관대하다.  그리하여 이번에 넷플릭스에 올라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를 이 영화는 2022년에 개봉했다. 지금으로 치면 3년이나 전에 개봉했음..

봄날은간다 2025.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