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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만 살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한 달을 좀 다르게 사는 것

'포르투 한 달 살기'라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을 보았다. 영상의 주인공은 퇴사 후 남편과 함께 일본에서도 한 달, 바르셀로나에서도 한 달, 포르투에서도 한 달, 이런 식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한 달 살기를 하는 중으로 보였다. 가장 최근 영상이 포르투에서 한 달 살기였는데, 나 역시 몇 년 전 포르투갈 리스본에 다녀온 기억이 있어서 꽤 흥미롭게 보았다. 물론 리스본과 포르투는 다른 도시이지만 같은 포르투갈이라는 점에서 어떤 동질감을 느낀 것 같다. 리스본은 페르난두 페소아의 도시이고, 그래서 리스본이, 포르투갈이라는 나라가 특별하게 다가왔듯이. 영상은 처음 포르투에 도착하여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를 찾아가는 여정부터 시작을 한다. 일단 숙소를 보여주고, 포르투의 거리 풍경과 건물들을 보여주..

잊히지 않는 혹은 잊을 수 없는

오래전 나는 어느 지면에선가 한강 작가의 글을 읽었고, 작가가 언급한 케테 콜비츠라는 낯선 이름의 예술가를 알게 되었다. 나는 무엇엔가 이끌리듯 그의 작품들을 찾아보았고, 얼굴을 감싼 검고, 굵고, 투박한 - 쉬 잊히지 않는 - 손과 자화상을 보게 되었다. 이상하지, 잊히지 않는 혹은 잊을 수 없는 기억처럼 그의 작품이 내 앞에 불쑥 나타나곤 하는 걸 보면. 이것은 분명 우연이겠으나, 우연이란 결코 우연하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니, 내 가슴속 어딘가 그의 인상이 저 검은 판화처럼 새겨진 탓이리라. 정말 이상하지, 실제로 그 작품들을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어떻게 그 이미지가 내게 들어와 새겨질 수 있나.

어느푸른저녁 2025.06.03

단상들

*광장 왼편 경사로를 끝도 없이 오르락내리락, 질척이는 소음의 늪지를 지나 바람을 흔드는 새떼들의 하늘 지나 낯선 길 하염없이 가고 있는 젊은 그녀 본다 겨잣빛 표정 위에 스치듯 피었다 지는 햇살 꽃송이 본다 - 류인서, 「삽화-부산역」 중에서(『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 수록) 류인서의 시집을 들췄는데, '부산역'이라는 부제가 붙은 시가 눈에 들어온다. 1박 2일간의 일정으로 부산을 다녀왔기 때문일까. 여행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내가 부산에서 한 거라곤 고작 어젯밤의 짧은 해운대 산책이 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산이라는 단어가 아직 내 곁에 남아 있는 느낌이다.(20250516) * 책을 읽고 있는데, 정말 책의 글자들이 낱알처럼 흩어지는 느낌이다. 그러모아지지 않고 흩어지고, 새어나가고, 부서져..

입속의검은잎 2025.06.01

씨너스: 죄인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씨너스: 죄인들》을 조조로 보았다. 토요일 아침부터 공포와 스릴러 장르의 어둡고 무거운(그럴 것이라 예상되는) 영화를 보는 것이 마뜩잖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사는 곳의 영화관에서는 이 영화를 오전에 단 한 번만 상영했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 번, 그것도 아침 9시 45분에 시작하는 공포 영화라니. 시간을 선택할 수 없다는 불평보다는, 그 시간에라도 상영을 해준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지경이겠지만. 어쨌든 갑자기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이 영화를 《블랙팬서》의 감독이 만든 작품 정도로만 알고 있었지, 무슨 내용인지, 어떤 장르인지 전혀 몰랐고 크게 관심도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영화 평론가들의 리뷰를 보게 되었고, 그와 더불어 예고편..

봄날은간다 2025.05.31

그렇게 또 한 시절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한 때는 그 동네에 살면서 산책을 많이 하던 곳이었는데. 이사를 하고부터는 거의 가질 않았던 것 같다. 본가에 다녀올 때 지나다니긴 해도 거기까지 올라가진 않았으니. 오늘은 당직휴무여서 오전에는 집에서 쉬고 오후에 아버지에게 가는 길에 공원에 들렀다. 조금이라도 더 걷기 위해 차는 본가에 주차해 놓았다. 오랜만에 간 공원은 여전히 아담하고 조용했다. 나는 익숙한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무성한 풀들을 보니 이제 정말 여름이구나 싶었다. 걷다가 사진을 몇 장 찍었는데, 찍은 사진마다 빛이, 마치 안개처럼 뿌옇게 부서졌다. 햇빛이 그리 강하지 않았는데, 이건 뭘까. 핸드폰 카메라 화면을 바라보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빛이 신기하여 카메라 너머 풍경을 다시 바라보았다. 습도도 그리 높지..

토성의고리 2025.05.31

김기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문학동네, 2024.

지금은 펼치지 않고도 떠올릴 수 있는 그 세계지도에서, 세상의 모든 바다는 분명 이어져 있다. 이제 나는 그 사실이 다소 무섭다. 바다를 등지고 아무리 멀리 가도, 반드시 세상 어떤 바다와 다시 마주치게 될 테니까. 그 불편한 예감에 시달릴 때마다 이상하게도 오래전 지하 소극장에서 본 오타쿠들이 떠오른다. 그 기모이한 오타쿠들의 열렬한 구호. 가치코이코죠. 진짜 사랑 고백. 좋아 좋아 정말 좋아 역시 좋아 ······ 그것도 사랑이라면, 나는 어쩐지 그 근시의 사랑이 조금 그립다.(37쪽, 「세상 모든 바다」) * 아무도 소개를 제안하지 않을 때가 오겠지. 연애나 결혼, 육아 같은 화두가 테이블에 오르면 쉬쉬하면서 내 눈치를 보거나 아니면 눈치조차도 보지 않고 나는 원래 상관없는 존재하는 듯, 무슨 ..

어쩌면 이곳은

출근길, 건물에 들어갈 때마다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하는 것은 새들의 지저귐이다. 나는 건물에 들어가기 전 고개를 한껏 치켜들고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본다. 희한하게도 새들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선명하다. 그런데 그 소리가 무척 경쾌하여 잠이 다 달아날 정도다. 저절로 지어지는 미소. 무겁던 출근길이 한층 가벼워진다. 그러다 오늘 오후 잠시 머리를 식히러 건물 밖을 나왔다가 새들을 보았다. 새들은 여전히 경쾌한 목소리로 알 수 없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는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들자 거기 거짓말처럼 아주 작은 새들이 건물의 구석구석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이곳은 원래 저 새들의 집이었는지도 몰라. 나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위에는 온통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고, 나무들이 ..

어느푸른저녁 2025.05.27

계시록

"서로 연결성, 연관성이 없는 정보들 사이에서 일정한 규칙이나 패턴, 의미를 찾는 거죠. 그냥 자연현상인데 특징적인 무언가 보인다고 믿는 거죠. 이런 사람들은 배가 떨어지면 기어이 까마귀를 만들어냅니다."(연상호 감독, 《계시록》 중에서) *계시라는 말은 매력적이다. 그 말은 지리멸렬한 내게도 무언가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도 가끔 계시라는 말을 쓴다. 쉽게 일어날 것 같지 않는 일이 우연하게도 연이어 발생했을 때, 혹은 스치듯 생각했던 것들이 갑자기 내 앞에 현실로 나타났을 때, 이것은 계시가 아닐까?라는 말을 쓰게 되는 것이다. 계시라는 말에는 위계가 있고, 설명할 순 없지만 어떤 영적인 존재의 특별한 힘이 느껴지는 것 같고, 그리하여 기대감이나 영감 등으로 한순간..

봄날은간다 2025.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