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아무것도 아닌 자의 상상

시월의숲 2025. 3. 29. 00:16

한결같은 단조로움, 지루하고 똑같은 일상, 어제와 오늘의 결코 다르지 않음, 내가 살아 있는 한 이것은 나를 영원히 떠나지 않으리라. 그 덕분에 내 영혼은 생생하며, 작은 것들이 주는 자극을 크게 느낀다. 우연히 눈앞을 날아가는 파리 한 마리에 즐거워하고, 어느 거리에선가 간간히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흥겹고, 사무실 마감시간이 다가올 때의 엄청난 해방감, 그리고 휴일이면 끝없는 평안과 휴식을 만끽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되는 나 자신을 상상할 수 있다. 내가 실제로 뭔가 대단한 존재였다면 나는 그것을 상상할 수가 없으리라.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이어서 페소아는 썼다.

 

"보조회계원은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꿈을 꾼다. 하지만 영국 왕은 그런 꿈을 꿀 수 없다. 왕이 되고자 하는 꿈의 가능성을, 영국 왕이라는 자리가 이미 차지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현실이 그에게서 느낌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확실히, 아무것도 아닌 자가 모든 것이 되는 자신을 상상할 수 있으리라. 상상의 다채로움에 대해서라면 아무것도 아닌 자의 승리인지도 모른다. 왕은 이미 '모든 것'이므로. 그는 상상하지 않는, 상상할 필요가 없는 자이므로. 그는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자이므로. 페소아의 말처럼 영국 왕은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꿈을 꾸지는 않겠지만, 보조회계원이 되는 꿈을 꾸지는 않을까? 그런 것은 상상조차 하지 않을까? 인간이란 자신이 가진 것 이상의 것만을 원하게 되는 것일까? 결코 알 수 없는 일. 왕이 아닌 나는 그저 상상하는 수밖에.

 

누군가는 팔짱을 끼고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상태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되는 나를 상상할 수 있다고? 천만의 말씀! 아무것도 아닌 것은 그냥 끝까지 아무것도 아닌 것이야!

 

어쩌면 페소아는 어느 정도 비관주의자일지는 몰라도 결코 패배주의자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