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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민진의 『파친코』를 읽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에 누군가 이 책을 원서로 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누군가의 서평을 읽었을 때도 그저 무덤덤했다. 그저 재미 교포 2세가 쓴 일본 교포들에 대한 이야기로구나 하면서 무심히 넘겼던 것이다. 그러다 애플 TV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에 대한 영상이 유튜브로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흥미가 생겼다. 예고편을 보았고, 드라마에 나온 배우들을 훑어보기 시작했고, 그들의 인터뷰와 드라마의 원작 소설가인 이민진의 여러 인터뷰까지 보게 된 것이다. 예고편으로 본 드라마의 영상미에 매료되었고, 무엇보다 이민진이라는 작가의 인터뷰가 -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내가 무려 '가족'이라는 말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

흔해빠진독서 2024.03.02

단상들

* '이월의 첫날, 봄비처럼 겨울비 내린다,라고 쓰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진다. 겨울에 내리는 비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라고, 2013년 2월 1일에 나는 썼다. 오늘은 2024년 2월 1일이다. 곧 있으면 2월 2일이 되겠지. 매 순간이 '작별들 순간들'이다.(20240201) * 내 무심함으로 인해 모든 일들이 망가져 가는 것을, 나는 그저 허허 웃으며 바라보고만 있다.(20240203) * 요즘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이 조금씩, 확실히 무너져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느낀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는 해준에게 붕괴되기 이전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우리 삶 자체가 이미 돌이킬 수..

입속의검은잎 2024.03.01

대학시절

버스엔 자주 빈자리가 없었다 천장에 달린 동그란 손잡이를 동아줄처럼 잡고 한 시간 넘게 흔들리던 버스에서 내리자 바닥이 출렁거렸다 강의실 의자에 앉자마자 잠이 들었다 잠은 무서운 중력으로 나를 짓눌렀고 나는 그것이 단순히 멀미 때문인 줄 알았다 천 원짜리와 이천 원짜리 중에서 고민하다가 버스비와 책값을 셈해보곤 천 원짜리 학식을 먹었다 건더기가 없는 맑은 국과 신 김치를 앞에 두고 나는 늘 예기치 못한 묵상에 빠졌다 게릴라 같은 통증이 수시로 나를 엄습했다 아프긴 아픈데 어떻게 아픈지 설명할 길이 없어 병원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설명할 길 없는 것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만 멀뚱멀뚱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알 수 없는 불길함으로 검게 젖어들던 그 시절의 저녁

어느푸른저녁 2024.02.28

파묘

를 보고 왔다. 어째 장재현 감독의 영화는 나올 때마다 영화관에서 보게 된다. 감독 때문에 영화를 보기보다는 영화의 소재나 내용에 흥미가 생겨서 보는 경우가 많은 나로서는 참으로 특별한 일이다. 물론 영화가 마음에 들면 감독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만큼 그는 흥미로운 소재들을 적절히 가다듬어 재밌게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이번에 본 도 그랬다. 얄궂게도, 내심 기대했던 는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좀 맥이 빠졌는데, 크게 기대를 하지 않고 본 는 그렇지 않았다. 어느 영화평론가의 말처럼, '누가 뭐래도 끝까지 파는' 것이다! 무속 신앙이나 한국적인 오컬트 같은 것에 무지한 나로서는 영화에서 그려지는 오컬트적인 것들이 어디까지 맞고 어디까지 말이 안 되는지 판단하지 못한다. 그런..

봄날은간다 2024.02.25

꿈 없이 빛 없이

'너무 많이 아는 자는 아직 알지 못하는 자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직 알지 못하는 자는 너무 많이 아는 자에게 다가가는 길을 찾지 못한다.' - 이동진, 중에서(『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수록) 문득 책장을 훑어보다가 이동진의 두툼한 ― 어찌 보면 목침 혹은 벽돌로도 보이는 ― 영화평론집을 발견하고 꺼내 펼쳐본다(사놓고도 전혀 읽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무심히 펼쳐진 책에 가 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것을 읽는다. 몇 년 전 보았던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면서. 그가 언급한,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그 '빛'을 떠올리면서. 처음에는 그 장면이 무엇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았으나, 글을 다 읽고 나서야 조금씩 떠오르던, 그 빛에 대하여. 하지만 그는 이렇게 끝맺는다. 그리고 이건 이 영화의 끝(혹은..

봄날은간다 2024.02.24

이민진, 《파친코》, 인플루엔셜, 2022.

"어딜 가든 사람들은 썩었어. 형편없는 사람들이지. 아주 나쁜 사람들을 보고 싶어? 평범한 사람을 상상 이상으로 성공시켜놓으면 돼. 뭐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법이거든."('파친코1', 74쪽) * "너는 아주 용감해, 노아야. 나보다 훨씬, 훨씬 더 용감해. 너를 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야."('파친코1', 307쪽) * "잘 들어, 이 친구야,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이 나라는 달라지지 않아. 나 같은 조선인들은 여길 떠날 수도 없지. 우리가 어디로 가겠어? 고국으로 돌아간 조선인들도 다를 바 없어. 서울에서는 나 같은 사람을 일본 놈이라고 불러. 일본에서는 내가 얼마나 돈을 많이 벌든, 얼마나..

단상들

* 갑자기 열이 나서 타이레놀을 하나 먹었더니 좀 나아졌다. 그리 춥지 않은 날씨인데... 감기가 오려는 것일까? 어쩐지 호되게 아플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이건 분명 날씨 때문은 아니리라.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과 이해받지 못하는 마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마음, 그 마음 때문일 것이다.(20240121) * 전혀 효과가 없는 약을 먹은 기분이다. 그러니까 어떤 약을 먹어야 할지 알 수 없다. 아프긴 아픈데 도무지 어디가 아픈지 모르겠다. 체했으면 소화제를, 목이 아프면 목감기 약을, 열이 나면 해열제를 먹으면 된다지만, 어쩐지 그게 아닌 것 같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내 이야기를 다 들은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게 몸살이라는 거란다." (20240123) * 저녁 식..

입속의검은잎 2024.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