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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

'뇌'크리에이션 강사가 말했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빈 종이를 반으로 접어, 한 면에는 내가 원하는 것을 적고 다른 면에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적어보세요." 내가 원하는 것을 적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으나,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적는 일은 어쩐지 망설여지고 생각이 많아졌다. 그러다 생각난 듯 '질병', '상실' 같은 단어들을 써 내려갔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던가? 그런 생각이 들자 이내 슬퍼졌다.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싫은 건 싫은 거라는 소심한 반발심도 들었다. 피할 수 없다고 그것을 좋아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좋아할 수 있는 일도 아니므로. 다만 어쩔 수 없이, 조금씩 받아들이게 될 뿐. 그..

어느푸른저녁 2024.11.30

조퇴에 대하여

조퇴라는 것은 물론, 필요에 의해서, 내게 허락된 시간을 조직의 허락을 받고 쓰는 일이지만, 그것의 가장 좋은 점이 조퇴하는 그 순간일 뿐이라는 건 좀 슬픈 일이다. 조퇴한 후의 시간과 정식 퇴근 후의 시간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그러니까 몇 시간 일찍 사무실을 나온다고 해도 퇴근 후의 남은 시간과 별반 다를 바 없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하긴, 고작 몇 시간 가지고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하겠냐마는. 그냥 그 시간이 아니면 하기 힘든 소소한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겠지만.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든다.  화창한 봄날, 벚꽃이 필 때나 가을 지나 첫눈이 내릴 때 조퇴하지 않는다면 생은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내가 정말 좋아하는 뮤지션의 공연이나 작가의 낭독회, 흔히 볼 수 없는 화가의 전시회 ..

어느푸른저녁 2024.11.26

위키드

뮤지컬로 보지 못한 '위키드'를 영화로 보았다. 무슨 내용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보았는데, 뮤지컬 특유의 흥겨움과 멋진 넘버들은 예상했던 바이지만, 인간의 여러 가지 면모를 볼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 글린다도 그렇고 피예로나 보크도. 다소 얄팍할지라도, 오히려 그래서 더욱 사랑스러운. 특히 파티 장면에서 단체로 춤을 추며 외치던, 먼지 같은 삶이니 노래나 부르고 춤이나 추자는(뭐 대충 그런 말이었던 것 같다) 말이 기억에 남는다. 뮤지컬이라면 응당 그런 요소들을 내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노래를 부르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살아있음을 여실히 증명하는 때도 없지 않은가!  결국 엘파바는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강력한 마법사로 성장하게 되지만,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마법은, 너무나도 다른 저 두 사람이..

봄날은간다 2024.11.23

어떤 절실함

*요즘엔 비가 세차게 오는 추운 날씨에 깊은 산속에서 작은 텐트를 치고 자는 사람들의 영상을 자주 찾아본다. 외부의 환경은 암담하고 춥지만 텐트 속 작은 난로와 침낭의 온기로 밤을 지내는 인간이라는 존재. 나는 지금 무언가 절실한 걸까 아님 절실함이 필요한 걸까.   *캠핑하러 가기 며칠 전에 나는 저런 글을 썼다. 캠핑하러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그저 내가 처한 상황이 자연스럽게 그런 흐름을 만든 것일까. 오래전 친구들과 한여름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잔 경험 외에는 캠핑을 거의 하지 않던 내가, 뭘 하든 귀찮아하는 내가 캠핑을 하게 되다니. 그건 사려 깊은 내 사촌 때문이었다. 사촌이 말했다. '그냥 몸만 와. 준비는 내가 다 할게.' 비가 세차게 오지는 않았지만, 밤새 바람이 불고..

토성의고리 2024.11.21

커피와 커피를 둘러싼 것들

처음에 주차장에 내려 건물을 보았을 때는, 이젠 유행이 지난 노출 콘크리트 구조의 평범한 건물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출구를 찾아 들어가면서부터 외부 내부 모두 한눈에 파악할 수 없는 독특한 건축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콘크리트와 자연에 있던 돌들과 갈대로 이루어진. 마치 원주의 '뮤지엄 산'이 그러했듯이. 그 공간이 주는 어떤 감정, 정서를 느끼며 커피를 마셨다. 우리나라에선 커피도 더 이상 커피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커피보다는 커피를 둘러싼 것들의 풍경이 압도하는 경우를 이제는 흔히 목격한다. 하긴, 커피도 커피지만, 우리는 그곳의 바람과 공기, 햇살과 어우러진 풍경을 마시기도 하니까. 두꺼운 옷을 입고 있어서인지 햇살이 제법 덥게 느껴지던 11월의 어느 날.

어느푸른저녁 2024.11.17

단상들

*그저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뿐인데, 그게 왜 이리 힘든 것일까?(20241102)  * 그저 풍경으로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얼마나 평화로운 일인가. 누군가에게 어떤 존재로서 아니라, 그저 풍경으로 존재하는 사람들. 내게 필요한 건 어쩌면 그런 존재감, 거리감이 아닐는지.(20241102)  * 처음엔 노란 단풍인가 싶었다. 잎이 우수수 떨어진 나뭇가지에 노란 등처럼 달려 있는 그것이. 하지만 가까이 가보니 그것은 단풍이 아니라 아주 작은 모과였다. 마치 알전구를 켜놓은 듯, 파란 하늘과 샛노란 모과가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모과가 모과임을 숨길 수 없는 그 향기!(20241103)  * 11월에 노랑나비를 두 번이나 보았다. 노랗고 가녀린 그 나비의 이..

입속의검은잎 2024.11.15

내가 쓴 편지들이 나를 다시 이끄는 것을

나는 오래전에 충동에 사로잡혀 썼던 편지들을 떠올렸고, 그 편지들은 타이프라이터가 아니라 손으로 쓴 것이지만,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수치심과 그리움을 동시에 느꼈다.  - 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중에서   이어서 그는 썼다.  '내가 쓴 편지들이 나를 다시 이끄는 것을 느꼈다. 그것들은 몸을 잃은 영혼과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우체부가 되어 내 편지를 다시 찾아오고 싶었다.'  나 역시, 오래전에 충동에 사로잡혀 썼던 편지들을 떠올렸고,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수치심과 그리움을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나는 설사 우체부가 된다 하여도 그 편지를 찾아오지는 못할 것이다. 그 편지는 부친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전해 준 편지였으므로. 나 스스로가 이미..

어느푸른저녁 2024.11.12

무려 칠백 년이라는 세월을

이 가을이 가기 전에 S가 말한 700년 된 은행나무를 보러 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주말이 다가오면 오늘은 가야지, 내일은 가볼까 하다가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흐지부지되곤 했다. 오늘도 역시 한 번 가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C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그저 생각만으로 그쳤을지도 모른다. C가 잠깐 들른다는 말에 나는 오늘 오후에 (나와의) 약속 - 계속 유예되기만 했던 - 이 있음을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와 먼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C를 만나지 않기로 했다. C와의 일은 굳이 만나지 않더라도 해결할 수 있는 실용적인 문제였으므로, 조금이나마 생길지도 모를 죄책감은 저만치 밀어놓을 수 있었다.  차를 몰고 외곽도로로 삼십 분 정도 가다가, 구불구불한 산길을 이십 분 정도 ..

토성의고리 2024.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