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994

메이 사튼, 《혼자 산다는 것》, 까치, 1999.

몇 주일 만에 처음으로 혼자 여기서, 마침내 다시 나의 "진짜" 삶을 시작하려고 하고 있다. 그것이 이상한 점이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혹은 무엇이 일어난 것인지 캐보고 알아내기 위한 혼자만의 시간이 없는 한, 친구들 그리고 심지어 열렬한 사랑조차도 내 진짜 삶은 아니라는 것이 말이다. 영양분이 되기도 하고 미치게도 만드는 방해받는 시간들이 없다면, 이 삶은 삭막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맛을 완전하게 음미하는 것은 내가 여기 혼자 있고 그리고 이 집과 내가 이전의 대화들을 다시 시작할 때뿐이다.(7쪽) * 내가 혼자 있을 때, 그 꽃들이 정말로 보인다. 나는 그것들에게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그것들은 어떤 영혼처럼 느껴진다. 그것들이 없다면, 나는 죽을 것이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할까? 얼마간..

단상들

* 글자가 보이지 않은 사람에게, 내가 쓴 글을 읽어주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다. 마치 내가 쓴 글이 아닌 것만 같은, 낯설고도 어색한 그 낭독의 순간. 미묘한 공기의 떨림과 서서히 밀려오는 어떤 슬픔의 눈으로 나는 그들을 바라본다. 가만히 듣고 있는 내 아버지를 본다.(20231203) * 내 몸 어딘가에 스위치가 있어 켜고 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와 비슷한 구절을 어디선가 읽은 것도 같은데. 일을 할 때는 일만 생각하고 퇴근하고 나서는 일에 대한 생각은 단 1초라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스위치가.(20231204) * 나는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한 말들이 상대방에게는 정반대로 느껴지는 순간에 대해서 생각한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희미해질 무렵, 상대방..

입속의검은잎 2023.12.28

네가 지금 겪는 일들은 모두 지나가는 과정에 있는 것

춥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제 정말 겨울 같다는 말도 뒤따라 나온다. 모든 것들이 새삼스럽다. 2023년의 마지막 달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12월이 되자마자 업무 때문에 계속 바빴지만 지난 이 주 동안이 절정이었다. 처음 하는 일도 아니었는데, 지난 6월보다 더욱 내 신경은 곤두섰고, 그래서 두 배로 피곤했다. 지난 주말엔 휴일도 반납하고 일을 해야 했던 것이다. 피로가 마치 납덩이가 되어 나를 내리누르는 기분이었다. 몇 번이고 확인했으나, 확인하는 횟수만큼 더욱 확신이 들지 않았고, 그래서 불안이 가중되었다. 마치 쓰나미를 온몸으로 맞고 있는데, 번개마저 함께 맞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몰아치던 나날들을 보내고 지금은 조금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찜찜한 기분은 사..

어느푸른저녁 2023.12.23

편지를 쓰고 있는 기억이 남아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

"그날 밤 티엔은 편지를 썼다. 받을 사람 없었지만 편지의 내용이 아닌 편지를 쓰고 있는 기억이 남아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본 것들을 적었다."(이상우, '배와 버스가 지나가고' 중에서 - 배수아 외,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미디어버스, 2020) 우리는 받을 사람이 없더라도 편지를 쓰며, 편지의 내용이 아닌 편지를 쓰고 있는 기억이 남아 이어지길 바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 편지의 내용이 아니라 편지를 쓰고 있는 기억이 남길 바라는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20210212) *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 알겠다. 오래전 내가 얼마나 정성스럽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골랐는지, 그리고 카드를 쓰면서 얼마나 설렜는지. 그리고 생각해 냈다. '편지를 쓰고 있는 기억이 남길 바라는..

어느푸른저녁 2023.12.12

단상들

* 우연히 책장을 보는데 데이비드 빈센트의 『낭만적 은둔의 역사』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제목에 이끌려 읽었던 것 같은데, 어떤 내용이었는지 정말 까맣게 생각나지 않는다. 아무리 망각이 내 특기이고, 어치피 모든 것들이 종국에는 잊힐지라도 이건 좀 충격적이랄까. 어쩌면 제목만으로도 충분했던 걸까?(20231102) * 고양이는 있고,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양이는 있지만 없고, 없지만 있다.(20231105) * 너는 힘들다고 내게 말했지. 하지만 네 고통을 내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겠니. 내 고통이 너에게 전해지지 않듯이. 나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고통스럽다.(20231107) * 이 아이를 어떡하면 좋겠니. 내가 말하자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걱정들. 황망한 눈물과 그건 아니라는 단호..

입속의검은잎 2023.11.30

차가운 밤공기로 그린 자화상 속으로

그 순간 나는 차가운 밤공기로 그린 자화상 속으로 발을 들인 것 같았다. - 조지프 브로드스키, 『베네치아의 겨울빛』 중에서 * 가끔(아니 대부분) 나는 내가 읽고 있는 책을 어떻게 구입하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내가 왜 지금 이 책을 읽고 있으며, 책의 무엇이 나를 이끈 것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간혹 책장을 살펴보다가 놀라기도 한다. 내가 언제 이런 책을 구입했지? 하면서. 그것을 처음 선택했을 때의 감정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옅어지기 때문이겠지만, 그 사실이 슬프다기보다는 때론 새롭고 낯선 기분을 느끼게도 한다. 마치 배수아의 『작별들 순간들』 속 문장들처럼, 나는 그것을 읽고, 그것을 잊으며, 다시 읽을 뿐인 것과 마찬가지로. 조지프 브로드스키라는 러시아의 시인이 쓴 이..

흔해빠진독서 2023.11.27

조지프 브로드스키, 《베네치아의 겨울빛》, 뮤진트리, 2020.

나는 그곳에서 내가 그 도시에서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 맞이하러 나와 주기를 기다렸다. 그 사람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11쪽) * 겨울은 나의 계절이었다.(13쪽) * 행복은 당신을 구성하는 원소들이 자유로운 상태에 있을 때, 당신이 그것들과 마주친 순간의 감정일 것이다.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자유 상태에 있는 원소들이 무궁무진하다. 그 순간 나는 차가운 밤공기로 그린 자화상 속으로 발을 들인 것 같았다.(16쪽) * 저온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움이 '진짜' 아름다움이다.(34쪽) * 병이 아무리 위중하다고 해도, 병만으로는 이 도시에서 지옥의 환영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이 도시에서 악몽의 먹이가 되려면, 당신은 특수한 신경증이 있거나 그에 비견할 죄악을 거듭 지었거나 아니면 둘 다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