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17 4

배수아 - 애국자들이 증오한 작가 베른하르트...공포·환각·독설 아래 그가 숨긴 것은

어느 해 겨울 나는 베른하르트의 책만 읽고 있었다. 마침내 보다 못한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당장 베른하르트 읽기를 중단하고 다른 작가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이다. 베른하르트에 심취해본 독자라면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북독일의 기후 아래서, 그것도 침울하고 어두운 기나긴 겨울 내내,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린 시골 마을의 오두막에서 베른하르트만 읽고 있으면 마음에 병이 들기 쉽다고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말했다.  책 속에서 베른하르트는 독설을 퍼붓는다. 그의 음산한 저주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향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두 망쳐버렸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그로테스크한 연극조로 과장되었다. 절반쯤 광증을 가진 자의 기나긴 독백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수목한계선 위의 황폐한 고원처럼 끝이 보이지 ..

배수아 - "입에 포도주를 붓자 소녀가 죽어버리고"...시대가 질식사시킨 작가의 독백

독일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말했다. 도저히 잊지 못할 만큼 깊은 인상을 받은 책이 있는데, 주변의 친구들 중 아무도 그 책을 읽었다는 이가 없어서 매우 놀랐던 경험이 있다고. 그의 주변인들이 모두 어떤 식으로든 문학 관련자인 것을 생각하면 그의 놀라움은 당연하다. 어느 날 그는 책들로 가득한 방에 초대받았다고 했다. 사방 벽의 책장을 채운 것은 주어캄프 출판사가 현대 세계문학의 고전이라고 할 만한 작품들을 선정해 심플한 디자인으로 출간한 비블리오테크 주어캄프(BS) 시리즈였다. 책등을 하나하나 살피던 그는 처음 보는 작가의 책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책을 펼친 후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 속에서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는 상처가 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

배수아 - 詩를 지운 문학이 포르노로 읽히고 말 때...뒤라스의 '연인'

30년이 지난 뒤 연인을 만났다,라고 나는 어느 책의 첫 문장을 썼다. 대학 시절의 어느 날, 나는 개가식 도서관 서고를 산책하다가 처음으로 연인과 마주쳤다. 도서관의 문학 코너는 대학생인 내가 가장 사랑하던 장소였다. 강의가 없는 시간이면, 혹은 때때로 강의가 있는 시간이라도 나는 거의 그곳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곳은 내가 아는 단 하나의 도피처였다. 다름 아닌 젊음과 청춘으로부터의 도피처. 나는 책들 사이를 거닐면서 커다란 유리창이 석양빛으로 불그스름하게 물드는 저녁까지 오후 내내 이어지는 산책을 했다.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책들을 건드리면서 걸었다. 그러다 우연히 마주친 연인. 그는 나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첫 만남의 순간부터 나는 연인이 뿜어내는 숨 막히는 호흡을 실제로 들이마실 수 있었다. 그것..

단상들

*조금 덜 외롭기를.(20250101)  * 2025년이라고 써놓고 한참을 바라본다. 아직 좀 더 친해져야 할 듯.(20250101)  * 대다수 국민들의 속을 뒤집어 놓고 화를 돋우며 정신을 고문하는 것이 저들의 전략이라면, 저열할지라도 아주 잘 먹히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 애쓰지 말자. 정신 건강에 해롭다.(20250104)  * ‘은밀한 생’에서 커피를 마시며, ‘은밀한 생’을 찾는 은밀한 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보며, 사람들을 만나고, 애도하고, 분노하고 때로 기뻐하며 소소한 일상을 살아갑니다. 이 보통의 삶은 도대체 무엇인가요. 요즘 들어 그런 의문이 더욱 커집니다. 이 삶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20250104)..

어느푸른저녁 2025.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