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고립에 관해서... / 배수아, '동물원 킨트'

시월의숲 2005. 2. 13. 14:20
"안녕. 잘 지내고 있겠지?
나는 너와 절교하기를 원해. 이제 다시는 만나기를 원하지 않고 그렇게 되지도 않을거야.
...

나는 한 도시를 떠나 다른 도시로 살러 갈 때는 과거 머물렀던 장소에 속하는 인간이었으니 말이지. 가능하면 나는 말이지, 사람보다 더욱 완벽하게 장소에 속하는 사물이고 싶어. 알디 수퍼마켓의 비닐백이라든가 전차를 탈때 사는, 날짜와 시간가지 표시되어 있는 승차권이라든가 밑바닥에 두가지 언어를 혼합해서 문장을 만들어 놓은 맥도날드 상점의 커피잔이라든가 말이지. 그렇다면 내가 이런식으로 절교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나는 단지 장소를 옮겨 머무는 조용한 사물에 불과하니 말이야. 내가 굳이 그런 편지를 쓰는 이유는 그럼으로써 나는 점점 더 그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지.
...

나는 모든 것들과 절교하려고 해.
너도 그 모든 것들 중의 하나니까."


또 작가는 고립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고립이란 정말 멋진 것이다. 그것은 거의 쾌락의 차원이다. 그것을 찬미한다. 그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진정 고립을 모르거나 혹은 나약하게 겁을 먹은 것이다."

고립을 쾌락의 차원으로까지 느낄수 있는 작가의 감성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글쎄, 나는 고립에 관해서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이 책을 읽고 고립에 관한 작가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느낄수 있었다.
하긴 나도 항상 그랬었지. 텅빈 운동장의 한 구석에 초라하게 남아 있는 녹슨 철봉처럼, 평소에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런 존재. 그렇게 난 고립에 길들여 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나도 어떤 장소가 되고 싶다. 사람들이 즐겨 찾지 않아도 엄연히 존재하는 그런 장소. 그래, 난 너와 절교 하기를 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