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인생의 기로에 설 때가 있습니다.
사소한 선택의 순간에서 부터 자신의 전 생애를 흔들만한 어떤 갈림길에 서 있는 경우까지. 그럴 때면 사람들은 보통 평탄할 것 같고, 보다 안전할 것 같은 길을 선택합니다. 아니, 뭇 사람들을 들먹일 것 까지 없이 제 자신이 그랬습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떤 용기조차 내보지 못한 채 주어진 길만이 최선이라 믿으며 살아온 것이죠. 마음속으로는 좀더 열정적이고, 치열한 삶을 살아보고자 생각하면서도 줄곧 '어쩔 수 없다'라는 말로 자신을 정당화시키며, 주위 상황을 탓하고, 스스로 체념하는 법을 익혔습니다. 그래서 내가 얻은 것이라곤 삶의 무기력함, 그것 뿐이었습니다.
교수이자 미술평론가인 저자가 쓴 '예술가로 산다는 것'(부제-숨어사는 예술가들의 작업실 기행)은 이런 무기력함에 빠져있던 제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여기에 소개된 예술가(화가, 조각가, 사진작가)들은 한적한 시골, 혹은 조그마한 작업실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남들과는 다른 길을 가는, 어떤면에서는 굉장히 고집스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세계는 각기 다른 형태와 빛깔을 띄고 있었지만 그들을 하나로 묶는 공통된 분모는 바로 삶에의 열정, 표현에의 열정이었습니다.
예술가라고 하면 자신의 내면에 표현해내지 않으면 안될 그 무엇을 그림으로, 음악으로, 몸으로, 글로써 표현해내는 사람일텐데 그런 열정은 도데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른지요. 그들은 얼마나 말 못할 상처를 가졌길래 그렇듯 격정에 휩싸여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만들며, 사진을 찍는 것인지 문득 궁금해 졌고, 종래에는 내 안에 나약하게 고여있는 무기력에 부끄러워졌습니다.
예술가들이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만들어 표현해낸다고 해서 그들이 결코 개인적 수준에 머무르는 것은 아닙니다.(물론 그러한 예술가도 있겠지만) 예술가란 무릇 개인적인 감상을 벗어나 인간의 보편적인 어떤 감성을 건드리는 상상력과 표현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면에서 이 책에 실린 예술가들의 작품은 저자의 날카로운 심미안에 걸러진 바닷속 진주와도 같은 작품들이었습니다.
저자 자신이 직접 만난 작가와 작품들에게서 느꼈던 깊은 애정과, 인간에 대한 통찰이 어우러진 깊이있는 감상이 저자 자신의 무르익은 글솜씨와 더불어 읽는 내내 제 가슴을 떨리게 했습니다.
한번 뿐인 삶. 그런 삶을 살자면 어떤 열정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비단 예술가만이 자신의 삶과 작품에 열정이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이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갔다면 내 삶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후회만 하고 있는 삶은 분명 비참합니다. 단지 인생의 수많은 길 가운데 하나로 흘러온 것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떨까요. 내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 내 앞에 펼쳐질 길은 예측할 수 없으니까 말이죠.
설사 내가 원하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들어섰다고 해서 성급한 후회는 하지 않으려 합니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곳이 있다면 조금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길은 언젠가 그곳으로 닿을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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