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도서관엘 갔었습니다. 이리 저리 책을 뒤적이다가 배수아의 책들만 모아놓은 책장 앞에 서서 그녀의 소설들을 들추어 보았습니다. 물론 제가 예전에 읽은 책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책도 있었죠. 그 중 분량도 얼마안되고 제목이 '철수'인 소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목이 철수가 뭐야, 촌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니 더욱 궁금증이 일더군요. 그래서 얼른 빼내 보았죠.
'철수'의 뒷표지에 이런 말이 쓰여져 있습니다.
'생의 치명적 이빨자국에 대한 보고서'
생의 치명적 이빨자국이라니... 무슨 의미일까... 이 짧막한 문장에 매혹되어 무엇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책을 빌려 도서관을 나와 그날 저녁 다 읽어버렸습니다.
'1988년 나는 경기도에 있는 한 대학의 임시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고 시작하는 이 소설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습니다.
1988년에 나는 대학의 임시직원으로 일하면서 저녁에는 식당의 청소와 설겆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돈을 버는 나는 예전에 공무원이었지만 뒷돈을 받았다는 혐의로 감방에 들어간 아버지와 무능력한 오빠, 알콜중독자인 어머니와 고등학생인 여동생 미아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남자친구인 철수는 군대를 갔고 제대하기 6개월 전 휴가를 나와서, 나와 관계를 가집니다. 군대에 있는 동안 철수는 무언가에 의해 변해버렸음을 나는 느낍니다. 철수가 휴가복귀를 하면서 면회를 오겠냐는 말에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면회를 간 날, 위병소 직원이 철수는 훈련을 나갔다고 말하고 나는 그를 찾아 훈련장까지 찾아갑니다. 그러나 그 곳에도 철수는 없습니다. 그 곳에 있던 영양실조 걸린 군인들이 철수란 이름이 두 개가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나. 나는 철수를 찾습니다...
사실 그녀의 소설에서 줄거리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최근 소설은 더더욱 그렇죠) 줄거리만을 말하자면 평범하기 이를데 없지요. 그런 그녀의 소설을 매혹적이게 하는 원인은 다름아닌 그녀만의 문체에 있습니다. 냉소적인 것 같지만 결코 냉소가 아니라 지리멸렬한 사회를 꿰뚫어 보고, 그 어두운 이면을 들여다 보는데서 오는 여유로움 혹은 허허로움 같은 것이 그녀 소설의 매력입니다. 가령 이런 표현,
'그런데 그때 조용하게 비를 맞으면서 무너져가는 빈집의 창가를 무생물의 풍경처럼 지나가고 있는 또 다른 나. 너는 어디에서 한평생 살고 있었나. 어는 어디에서 노래를 부르고 마루에서 고양이를 잠재우며 흡혈식물 같은 입술을 닫고 지나가는 아침 노을과 여름 오후의 비를 맞으면서 시간의 여울을 떠다니고 있었나. 이제 어디에도 없을 나, 재가 되어 사라지고 어둠이 되어 부패할 나, 그런 내가 내 인생을 온통 방치하고 유기한 채 이 추락의 마지막에서 누추한 손을 내민다. 사실은, 나는 내가 아니었다. 짐승의 몸을 가지고 태어나 가난과 모욕의 노예가 되어 살아갔던 나는 잠시 악령에 유혹되어 나를 떠나온 허공이었을 뿐이다. 멀리 있는 나는 귀하고 아름답다. 그리하여 내 몸은 타락하고 또 타락해도 백 년에 한 번 꽃 피는 사막의 난초처럼 또 다른 나는 생에 대한 불감(不感)으로 너에게 다가간다.'
현실의 가난과 그로 인해 생기는 엄연한 계급의 존재. 지리멸렬한 삶을 벗어나 그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감동하지 못하는 불감(不感)으로서 삶을 말합니다. 사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삶의 모든 절망적인 것들은 절망이 아닌 것이 되겠지요. 하지만 희망조차 느끼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녀는 그 모든 것들을 초월하기를 바라는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되어 나는 시간을 살아남았다.'
'철수'는 그렇게 끝이 납니다. 그녀가 노래하는 '박제처럼 아름다운 궁핍의 고요'란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되어 시간을 살아남아야만 느낄 수 있는 그녀만의 방식에서 오는 어떤 성찰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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