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누군가 작정을 하고
하늘에 있는 모든 구름들을 갈기 갈기 찢어
한꺼번에 뿌려대듯, 사납게,
제가 사는 이곳에도 폭설이 내렸습니다.
듣기로는 3월달에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린 적은
백년만에 처음이라고 하는군요.
눈은,
속도를 잊은 차들의 시커먼 차체 위로,
거미줄처럼 엉켜있는 전선 위로,
가난한 집의 스레트 지붕 위로,
장독대 위로,
모든 것들의 머리 위로 내리고
또 내렸습니다.
백년만에 처음이라는 말을 되내이며
끊임없이 내리는 눈을,
마치 그 순간만은 영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끊임없이 바라보았습니다.
그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의 터울을 깨고 내린 눈.
백년만의 폭설.
고립감
그날은 학교엘 가는 날이었는데
통학버스가 4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아
시외버스를 탈까 잠시 망설이다가 그만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집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기분.
모든 소리를 빨아들이듯 눈은,
고요히, 그리고 환하게 쌓이더군요.
아, 고요한 고립감.
발이 묶여 있는 그 고립감이
그리 나쁘지 만은 않았습니다.
거리
눈이 그치고
온통 폭설 휴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거리를 걸었습니다.
걷다가 세 번이나 넘어질뻔 했지 뭐예요.
폭설이 퍼붓고 난 후의 거리는
하얀 눈 만큼이나 아름답지는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올 때는 하얗던 눈이
지상의 것들과 만나자
그 순수를 잃어 버린 것 같아서
조금은 서글픈 생각이 들더군요.
순수하면 할수록 때가 타기는 쉬운 걸까요
하지만
햇살에 드러난 건물들은 마치
눈에 씻기기라도 한듯 선명하고 깨끗해 보였습니다.
자신을 희생하여 더러운 것들을
씻어주는 절대순수.
내 마음의 시궁창에도 하얀 눈이 내렸으면
이십오년만의 폭설이
내 마음에도 내렸으면.
-2004년 3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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