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오랜 시간 방치된 카메라처럼

시월의숲 2005. 7. 24. 12:27

며칠 전 집안을 정리하다가 쓰지 않는 서랍 속에 잠들듯 들어있는 카메라를 발견했다. 아, 카메라가 있었지! 그동안 나에게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 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사진을 찍을 만큼 기념할 만한 나날들이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었을까, 순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 낡은 카메라는 요즘 무척이나 세련되고 작아진 디지털 카메라에 비해 터무니없이 커 보였고 그로인해 굉장히 무식하고 과격하게까지 느껴졌다. 그 당시에는 아마도 최신형으로 각광 받았음직한 카메라였을텐데, 세월은 카메라까지도 늙게 만들어 버리는 구나, 생각하며 한참동안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카메라는 (당연하게도) 건전지가 다 되어 작동이 멈춰 있었지만, 그 안에는 신기하게도 필름이 들어있었다. 필름? 나는 생각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찍었던 거지...? 도무지 생각나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생각나지 않는 기억 하나를 아무런 계기 없이 떠올려 보라는 것과 같았다.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정체불명의 그 필름을 들고 사진관에 찾아가 맡겼다. 아마도 굉장히 오래되었을 거예요, 나는 사진관 아저씨께 그렇게 말했다.

 

다음 날, 사진을 찾으러 사진관에 갔다. 너무 오래 방치해 둔 필름이라 색상조정을 했는데도 그것 밖에 안 된다고 말하며 사진을 건네 주시는 아저씨께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사진관을 나왔다. 사진은 한 이 삼년 전에 찍은 것들이었는데 사진관 아저씨의 말처럼 색상이 선명하지 못하고 전체적으로 거무틱틱하게 나와서 마치 오래된 흑백사진을 보는 듯했다. 내가 대학교 1~2학년 때의 동생과 찍었던 사진들과 이등병이었던 시절 첫 면회 때 찍었던 사진들, 동생 고등학교 졸업 때의 사진, 그리고 누군지 알 수 없는 아이들이 사찰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들이었다. 참 다양한 시간들을 찍었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사진을 보는데 사진 속의 내가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빛 바랜 사진 같아서일까...

 

과거의 어느 한 시절, 어느 한 시간에 나는 분명 사진 속의 그 곳에 그렇게 있었을 것이다. 약간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 시절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걸까? 사진 속의 나는 지금의 나인가? 나는 그 시절로부터 얼마나 멀리 와버린 걸까... 인생이 그렇듯 몇장의 사진들로 남는 것이라면 나는 결코 사진 같은 것은 찍지 않으리라. 이런 저런 감상적인 생각에 약간 슬퍼졌던 것 같기도 하다. 불과 몇년 전의 것들인데... 지난 사진은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든다.

 

오랜 시간 방치된 카메라처럼 그렇게 잊혀지고 싶다. 그 안에는 물론 필름도 들어있어야 하겠지. 내 인생에서 소중한 순간들만이 찍힌 필름이. 물론, 지금 내 인생의 필름은 다 돌아가지 않았다. 앞으로 얼마만큼의 소중한 순간들이 펼쳐질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추억이 카메라와 다른 점은 카메라처럼 의식적으로 찍지 않아도 추억은 자연스레 남는 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연스레 인화되는 추억을 필름처럼 간직한 채 방치된 카메라처럼 서서히 잊혀져도 좋으리라. 정녕 그래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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