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21세기 종자론

시월의숲 2005. 6. 24. 13:19

  "그건 종자가 다르기 때문이야." 라고 그가 말했다.
 

  우리는 그때, 개나 고양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길, 자기가 만난 사람 중에는 결코 자신과 친해질 수 없고, 친해지고 싶지도 않으며, 음악이나 미술 따위의 이야기는 전혀 알지 못하고 오로지 돈과 여자 밖에 모르는 답답한 부류가 있는데, 그것은 그들과 자신이 종자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사람은 누구나 다 다른 법이고, 네가 관심가지고 있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너만의 착각이자, 오만일지도 몰라."

나는 솔직히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잠시 침묵하고 있던 그가 대답했다.

 

  "아니. 그건 착각도 오만도 아닌 엄연히 존재하는 진실이야."

  그는 단호히 아니, 라고 말하고는 냉소적인 한숨을 내 쉬었다. 그의 표정 없는 얼굴은 미로 속을 빠져나오다 순간 벽을 만난 사람처럼 더욱 굳어졌다. 나도 자신과 다른 종자라고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결코 소통할 수 없고, 타협할 여지라곤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는 답답한 종자.

 

  "세상엔 물론 그런 사람들이 있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을 종자라는 단어로 설명하려 드는 건 그리 유쾌한 사고는 아닌 것 같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말이지. 어쩜 그건 코드의 문제가 아닐까?"

 

  "넌 세상을 너무나 아름답게 보는구나. 그것도 지극히 인간답게. 하지만 그런 휴머니즘적인 허울을 벗기고 나면 세상은더러운 것들, 온갖 혐오스러운 것들로 덥혀 있다는 걸 모르겠니? 아직도 세상엔 우성인 종자와 열성인 종자가 존재하지. 우성인 종자인 척 하는 종자도 물론 존재하고. 열성인 종자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우성인 종자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해. 그건 이미 확고하게 정해진 것이거든. 그 어마어마한 벽을 우리 같은 열성인 존재가 넘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이건 단순히 백인과 흑인처럼 피부색이 다른 차원이 아니야."

 

  "비약이 심하구나.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의 차이에서 비롯된 네 종자론이 이제는 우열론으로까지 넘어가다니. 어쨌든 네 말에도 일리는 있어. 그렇다면 말이야, 그렇게 타고난 종자인 우리 개개인들은 서로 비슷한 종자끼리 밖에 살아갈 수 없는 건가? 아니면 영원히 자신만의 세계에서만 살아가야 하는 거야? 그렇게 뒤틀리고 냉소적인채로? 정말 그래야 한다면 삶이 너무 피곤하지 않겠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음악을 듣고 싶다고 말하고는 이내 이어폰을 끼어 버렸다. 그가 이어폰을 낀다는 것은 말을 하기 싫다는 의미임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J. 그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는 아무것도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지도 몰랐다. 그저 세상을 냉소한 채 음악이나 듣고, 책이나 읽으면서 자신의 예술적 취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종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는 그것으로 너무나 충분한 듯 보였다. 그는 자신과 예술적 취향이 비슷한 사람을 찾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으며 타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그가 혐오하는 사람 중의 하나가 연예인들에 대해서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배타적인 그가 종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사유의 귀결인 듯 보였으나 한편으로는 굉장히 의아한 일이기도 했다. 타인이 무슨 종자이건 무슨 상관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를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의 초라한 집을 나왔다. 현관문을 열면서 힐끔 돌아보니 그는 이어폰을 낀 채로 눈을 감고 천천히 고개를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음악에 너무나 심취한 모습이어서 잘 있으라는 인사조차 건넬 수 없었다. 어쩌면 인사 따윈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골목엔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가로등이 하나 둘 그 희미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고 나는 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그의 집을 나오면서, 나는 언젠가 그와 그가 이야기 했던 종자론에 대해서 글을 쓰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간낭비 일 뿐이라 해도. 어쩌면 그때, 나는 그의 궤변을 어렴풋이 인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랬다면, 그건 그의 집 앞 골목길이 너무나 어두웠기 때문일 것이며 가로등 불빛이 터무니없이 희미했기 때문이리라. 단지 그것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