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배수아, <철수> 중에서

시월의숲 2005. 8. 14. 17:56

 

날 태워봐. 기름을 바르고 내 몸에 불을 붙여봐. 마녀처럼 날 화형시켜봐. 쓰레기 봉지로 날 포장해서 소작로 속으로 집어던져봐. 나는 다이옥신이 되어 너의 폐 속으로 들어간다. 내 얼굴을 면도칼처럼 가볍게 긋고 스며나오는 피를 빨아봐. 고양이처럼 그 맛을 즐겨봐. 그래서 나는 피투성이가 되고 싶어. 내 안에 있는 나는 무엇인지, 어떤 추악한 것인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채로 이 세상을 떠나가게 되는 것이 두려워 나는 마지막에 비명을 지르면서 눈물을 흘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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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때 조용하게 비를 맞으면서 무너져가는 빈집의 창가를 무생물의 풍경처럼 지나가고 있는 또 다른 나. 너는 어디에서 한평생 살고 있었나. 너는 어디에서 노래를 부르고 마루에서 고양이를 잠재우며 흡혈식물 같은 입술을 닫고 지나가는 아침 노을과 여름 오후의 비를 맞으면서 시간의 여울을 떠다니고 있었나. 이제 어디에도 없을 나, 재가 되어 사라지고 어둠이 되어 부패할 나, 그런 내가 내 인생을 온통 방치하고 유기한 채 이 추락의 마지막에서 누추한 손을 내민다. 사실은, 나는 내가 아니었다. 짐승의 몸을 가지고 태어나 가난과 모욕의 노예가 되어 살아갔던 나는 잠시 악령에 유혹되어 나를 떠나온 허공이었을 뿐이다. 멀리 있는 나는 귀하고 아름답다. 그리하여 내 몸은 타락하고 또 타락해도 백 년에 한 번 꽃 피는 사막의 난초처럼 또 다른 나는 생에 대한 불감(不感)으로 너에게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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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조금 내 눈에 고였다. 나는 살아온 지금까지도 슬픔이란 무엇인가 잘 알 수가 없었다. 강력하고 선명하게 내 가슴에 찾아오는 사나운 폭도 같은 슬픔. 그런 것이 무엇일까. 우리의 모든 일상과 권태와 반복과 연극을 투과해서 스며 들어오는 슬픔이라는 것이 살을 찢는 고통이나 발바닥에 박히는 유리조각처럼 정말로 존재하는 어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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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되어 나는 시간을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