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간다

사랑했던 기억을 지운 뒤 우리에게 남는 것은? - 이터널 선샤인

시월의숲 2006. 1. 21. 18:02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기억을 지워버린다면 사람은 어떻게 될까? 그걸 어떻게 지워버릴 수 있냐고 따지지 말고. 만약, 인간이 자신이 지우고 싶은 기억만을, 상처를 도려내듯 깨끗이 없앨 수 있다면? 자신이 그토록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었으므로 그는 행복해졌을까? 그 기억이 과연 무엇이길래?

 

조엘(짐 캐리)와 클램(케이트 윈슬렛)은 판이하게 다른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것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런데 어느날 클램은 조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수많은 추억들을 만들며 오랫동안 사랑했던 사이인데, 어떻게 그녀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지. 조엘은 크게 실망한다. 왜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지  밝혀내기 위해 노력하던 끝에 그는 그녀의 기억이 그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삭제되었음을 알게된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에 대한 기억을 통째로 없애버린 것이다. 도대체 왜? 그는 심한 당혹감과 배신감을 느끼며 자신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녀와 관계된 기억을 모두 지워버린다. 그렇게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린 조엘과 클램(원래 이름인 '클레멘타인'의 애칭). 그 둘은 이제 완전한 남남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렇다면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 사랑할 수 있을까? 우연히라도 그들이 다시 만나게 된다면?

 

어떤 면에서 기억을 지운다는 것은 삶을 더욱 편안하게 만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특히 두번 다시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지운다면 적어도 그 기억으로 인해 현재의 삶이 고통받는 일은 없을테니까. 하지만 그것이 사랑에 관한 기억이라면? 그것은 다른 기억들과 조금 다르지 않을까? 왜냐하면 그것은 머리에 기억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가슴에 기억되는 것이므로. 사랑에 관한 기억을 지우고 난 후 남는 것은 바로 사랑 그 자체이므로. 온몸으로 느낀 사랑의 감정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 의해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사람 고유의 체취로 남아있다. 보이지는 않지만 마치 문신처럼 서로의 가슴에 각인되어 있는 그들. 그것은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 할 것이다. 영화의 처음, 서로의 기억을 지운 뒤 다시 만난 열차에서 클램이 조엘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우리 어디선가 만난적이 있지 않나요?" 

 

<이터널 선샤인>은 이처럼 기억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결국 처음 사람들이 만나 사랑할 때의 감정, 첫 설레임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들이 서로를 지웠다는 것은 다시 처음 만날 때의 감정으로 돌아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들이 서로를 속속들이 알기 전, 즉 서로에 대한 환멸을 느끼기 전의 상태로. 그래서 그들은 또 다시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처음 서로에게 끌리던 그 감정까지 지우지는 못했으니. 기억은 지워도 사랑은 지워지지 않으므로. 그것은 어쩌면 사랑을 너무 얕본데 대한 벌이 아닐까? 사랑은 그렇듯 지독하고 징그러운 것일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사랑했던 기억은 비록 그것이 죽을만큼 아픈 기억일지라도 그 자체로 너무나 아름답게 보인다. 눈이 부실 정도로! 그것이야말로 진정 사랑을 했다는 증거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