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오늘은 내 생일. 생일날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단순한 사람들은 (하찮게도) 생일 축하를 받지 못했다고 그런게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고, 조금 덜 단순한 사람들은 아마도 축복받지 못할 출생의 비밀을 가졌나 보다 하고 측은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그건 아니다.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내가 오늘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런 치기어린 감상에서가 아니라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게 거창한가? 그건 아니지.
생일날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일반론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태어나면서 이미 죽음을 예약해 놓았지 않은가. 그 정확한 날짜가 정해지지 않았을 뿐. 삶과 죽음은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쉽게 잊고 산다. 하긴, 한창 살아가야 할 나이에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스운 일이겠지.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나는 어찌된 일인지 태어난 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면 참을 수 없이 슬프기도 하지만 때론 다른 어떠한 시간보다도 평온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죽음을 예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삶을 예찬하는 것 만큼이나 부질없는 일. 다만 그것을 생각한다. 삶 속에 있는 죽음에 대해. 결코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다. 내가 아닌 타인의 죽음으로 인해 내가 받는 영향, 내가 죽음으로서 타인이 받을 영향. 죽음은 저마다의 삶에서 다른 사람의 삶으로 파장을 일으킨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게 죽음은 사람들의 가슴에 저마다의 언어로, 감정으로, 형상으로 새겨진다.
죽음과 죽음을 둘러싼 것들. 우리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건 죽어봐야 아는데, 죽고 나서는 어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둘러싼 것들을 통해 그것의 본질을 유추할 수 밖에 없다. 고로 모든 죽음에 관한 이야기들은 죽음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그 모든 이야기들이 죽음의 이름을 얻는다. 죽음의 한 징후가 된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든다.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만큼 삶에 대해서 생각했을까? 하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얼마 살지도 않은 내가 이야기하기엔 적당하지 않은 주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가 겁이 나서일까? 삶이 그리 녹록치 않아서? 아아... 그래...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죽음에 대해 그리도 생각했으면서 나는 왜 삶에 대해 그리 말하기를 꺼려 왔던 것인지... 죽음이란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죽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나는 지금 삶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이 곧 죽음과 같은 의미임을 깨달을 때까지.
죽을만큼 살자.
살만큼 살고 죽지 말고, 죽을만큼 살고 죽자.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바로 그것이다. 엄살떨지 말고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래, 그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