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중얼거리다

시월의숲 2007. 5. 11. 14:29

나는 늘 몰입에 대해 생각했고 또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으나, 그것이 순수한 것이라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종종 그것은 나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이름도 알 수 없는 신흥종교의 광신도들의 믿음이 그들 자신에게는 절실한 믿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나는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타인의 눈으로 봤을 때는 그것이 한갓 정신이 나간 짓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은 때로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이나 그 밖의 타인들에게까지 피해와 고통을 주는 것이다. 어쩌면 절대 순수(만약에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라는 것은 다른 말로 절대적인 정신적 육체적 폭력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의심되기도 한다.

 

큰어머니를 따라 성당에 가 보았다. 군에 있을 때 가 본 것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간 것이었는데, 처음 이야기를 나눠본 수녀님의 인상은 참으로 좋았다. 종교가 자신을 얽메이는 것이 되면 안된다는 말씀에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지만 이 두려움과 알수 없는 부담과 거북함은 무엇일까. 믿음. 절대자를 믿음으로서 오는 안정과 평화. 모든 의심스러운 것들을 걷어내고 난 후 얻어지는 어떤 맹목성. 그 맹목성으로 인해 생기는 찬양과 기댐. 아, 그런 것들 속에서 산다면 얼마나 걱정이 없을까. 오롯이 자신을, 자신을 창조한 절대자에게 맡기는 것은! 하지만 나는 그것에 몰입하는 나 자신이 두렵다. 그것이 나에게 어떤 안정을 가져다 줄지는 몰라도 그것은 결국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심 때문이다. 어떤이는 그것을 영혼없는 인형이라고 했던가.

 

의심은 결코 의심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요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나 지금처럼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어지는 시대에는 그것이 지금껏 진리라는 이름 하에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여지던 것이라도 한번쯤은 의심을 해봐야만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건전한 의심에서 나오는 건설적인 토론과 그로 인해 발견되는 이해의 과정. 그것을 나는 지금 필요로 한다. 허나 종교는 그런 것들을 무력화시킨다. 모든 의심스러운 것들은 믿음이라는 거대한 융단 속으로 들어가고, 그 위에 앉은 사람들은 융단의 부드럽고 잘 짜여진 바느질과 아름다운 무늬만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얼마나 기만적이고도 이기적이며 위선적인가!

 

나는 지금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들은 모두 한낮 중얼거림에 지나지 않는다. 이 중얼거림이 내 존재이유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린다. 나는 종교를 알지 못하고 하느님을 알지 못하며 종교적인 믿음의 순수성을 두려워한다. 나는 무엇이든 끊임없이 의심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나는 예술을 믿을 것이다. 예술은 절대적인 믿음이 없고, 보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르며, 각자에게 나름의 의미로 다가온다. 그것은 나를 의심하게 하고, 가족을, 나아가 사회를, 문화를 의심하게 만든다. 그것은 무언인가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그렇게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이해할 것이고, 중얼거리면서 그것을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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