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당신은 몇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나요?

시월의숲 2007. 5. 22. 13:40

나는 열 개가 넘는 카페에 가입하고 있고, 열 개가 넘는, 소위 닉네임이라고 불리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카페를 가입할 때마다 닉네임을 입력하라는 명령문을 보고 나는 무척 망설인다. 하나의 닉네임으로 통일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어쩐지 그럴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래, 그것은 나에게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일본 애니나 영화를 볼때면 그들은 유독 이름에 대해 집착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진짜 이름이 무엇이냐고, 한번도 그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네가 그 이름을 불러 주었으면 좋겠다는 등의 대사들. 이름은 바뀔 수도 있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집착을 하는 것일까. 이름을 얻음으로써 '그'는 온전히 '그'가 되는 것인가? 이름 없이 잡초라 불리는 것들은 정녕 슬픈 존재들인가?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게 되어 버리는?

 

이 카페에서는 이런 이름을 가진 내가 저 카페에 가면 다른 이름을 가진 내가 된다. 그것은 내가 아닌 또 다른 나인가, 아니면 여전히 온전한 '나'인 것인가. 한 사람의 내면에는 수십개의 또 다른 '나'가 있을 것이다. 사이버 공간은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는 독특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비겁한 일인가? 그 곳에서 그렇게 불리길 바라고 또 그렇게 불리고 있다면 그렇게 불러줘야 할 것이다. 그 누가 비난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내'가 아니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모든 이름들은 내 안 있는 또 다른 '나'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그러한 내 생각은 내가 가진 분명한 이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겠냐고. 내가 가진 분명한 이름... 그것은 과연 닉네임과 다른 것일까. 내가 가진 모든 이름들은 모두 나를 지칭하며 나에게서 파생되어진 것들이다. 고로 나는 그 모든 이름으로 불릴 수 있으며 원한다면 그렇게 불려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모든 이름들은 바로 나이며, 그러므로 내가 아닐 수도 있다. 이 곳은 그러한 혼란과 모순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곳이다. 디스토피아이거나 유토피아, 혹은 블랙홀. 아무 것도 아닌 세상이거나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세상.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아니, 여기서는 그렇게 물어봐서는 안되지.

 

당신은 몇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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