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어렸을 때부터 주위 사람들로부터 착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서른 살이 가까워오는 지금도 가끔 그런 말을 듣는다. 그는 주위 사람들로 부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작 그는 자신을 착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을 착하다고 하는가? 그 누구에게도 반항하지 않고,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며, 시키면 시키는데로 하는 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그 '착함'인가. 그렇다면 그는 착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소위 내성적인 아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착함이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어떤 말이든 고분고분 듣기만 하고, 말수가 극히 적으며,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런 존재가 착한 것인가. 사실 그는 그 모든 사물과 현상에 대해서 감흥이 없었다. 그에게 삶은 지루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지루함도 이내 심드렁해졌다. 그러니까 그는 모든 것에 대꾸하기가 귀찮았던 것이다. 사람들과 말을 섞었을 때 발생하는 불필요한 오해와 가식적인 포즈, 짜증나는 잡음이 너무나도 싫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에게 피곤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가 왜 사람들이라면 으레 하는, 일상적인 일들에 그토록 피곤함을 느끼게 되었는가. 그는 왜 지극히 자연스럽다고 생각되는 일들을 두려워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냉소도 아니었고, 위악도 아니었다. 냉소와 위악, 비난 같은 것들. 그것은 어느 소설 책에 씌여진 것처럼 삶에 참가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들이다. 그는 삶에 대해 냉소적이지도 않았고, 일부러 위악적인 포즈를 취하지도 않았으며, 누군가를 혹은 무엇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태어났기 때문에 사는 것 뿐이었다. 왜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그냥, 살았다.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착하다는 꼬리표를 붙여주었다.
그래서 그는 계속 그렇게 살았는가. 알 수 없다. 그것만은 정녕 알 수가 없다. 다만 그는 언젠가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왜 살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리고 스스로 팔목을 그었다. 하지만 그것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고 자신을 발견한 아버지에 의해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 후 그는 돌연 사라졌다. 그를 아는 사람들로부터 그는 탈출을 감행했다. 그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원래부터 그를 아는 지극히 적은 사람들의 머릿속에만 어렴풋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의 과거에 대해서도 들은 바가 없다.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 외에는. 그래서 그의 성격이나 행동을 그의 과거에 비추어 해석하려는 어리석은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렇게 잊혀져갔다. 그렇게 사라져갔다.
얼마 지나지 않은 미래의 어느 날, 그는 다시 나타날 것인가. 나타나서 자신의 존재를 당당히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가 바랐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나.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다. 그가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온전히 그 자신 밖에 모르는 일일 것이므로. 다만 그의 행보가 조금이나마 덜 쓸쓸하길 바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