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이승우, 『생의 이면』을 읽고

시월의숲 2007. 10. 23. 22:03

왜 이제야 이 책을 읽게 된 것일까. 좀 더 이른 나이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과거 혼란스러웠던 마음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가족들로부터 파생된 분노와 증오 같은 것들을 조금이나마 덜 아프게 삭힐 수 있었을 텐데. 이 책으로 말미암아 숨쉬기가 조금은 수월했을 터인데.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은 안타까움인가.

 

이승우의 <생의 이면>을 읽으면서 나 자신이 쓴 내면의 기록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놀라움에 사로잡혀 한동안 꼼짝 할 수 없었다.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는 박부길이라는 소설가의 역사와 그의 작품 간의 관계를 밝히고 있는 소설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이승우라는 작가 자신의 초상이 엿보이는 굉장히 자전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이었다. 물론 나는 이 작가의 역사를 잘 모른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고 그 속에 등장하는 박부길이라는 소설가와 이승우라는 소설가를 따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다른 어떤 소설가의 소설보다도 더. 이것은 소설이니까, 즉 만들어낸 이야기니까 상식적으로 박부길은 이승우가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박부길은 이승우가 되기도 한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모든 소설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라는 명제를 우리는 또한 기억하고 있다. 모든 소설은, 어떤 식으로든 글쓴이의 자전적인 기록이다. 소설을 읽는 즐거움 가운데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은밀함이다. 어떤 ‘다른 사람?’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작가가 창조해 낸 가짜의 인물이다. 그러나 독자는 그 가짜의 인물, 가짜의 역사를 통해 비밀스러운 기쁨을 가지고 작가의 삶을 들여다본다. 하나의 소설은 독서를 통해 완성되는데, 그 소설은 결국 작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독자들에 의해 작가 개인의 삶의 이력으로 읽히고 만다. 그런 뜻에서라면, 부인할 필요가 없다. 이 소설은 자전적이다.”

 

교묘하게 말하고 있지만, 나는 이 문단을 작가 스스로 자전적 소설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설사 이 소설의 주인공이 작가와 전혀 닮지 않았다고 해도 말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폐쇄적이고 조용하지만 내면에는 끓는 용암을 안고 있는, 자의식과 죄의식으로 가득 찬, 한 사내의 내면적 성장의 기록으로서 나에게는 굉장히 실제적이고 절실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박부길에게 낙인처럼 찍혀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불합리한 세상에 대처하는 방식, 자신에게로의 깊디깊은 침잠, 죽음 같은 삶, 삶이 주는 모욕을 온몸으로 받는 그. 그 내면의 기록이 하나같이 나에게는 놀라웠고, 마치 그 모든 것들이 나 자신에게 일어난 일인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박부길에게 그런 죽음과도 같은 삶을 견디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신? 한 여인과의 사랑? 문학? 어머니? 아니면 그 모든 것?

 

소설을 읽는 내내 슬프고 어딘가 아픈 느낌이었으나 읽고 난 지금은 후련하고 편안한 느낌이다. 박부길은 결국 아픈 과거를 딛고, 아니 안고서 삶을 견디는 최후의 수단으로 결국 소설을 썼으며, 그렇게 아버지와 여인, 세상과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아마도 그러한 비극의 승화(라고 할 수 있을런지)가 내가 소설을 읽고 난 후 느꼈던 후련함과 편안함의 이유일 것이다. 그럴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나 또한 나와 나를 둘러싼 것들에 대해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예감. 나는 생각한다. 일찍 이 소설을 읽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은 얼마나 비겁하고 가식적인 자기기만인가. 왜냐하면 과거는 과거로서 현재의 나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고, 나는 그때로부터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내 남루한 생의 이면의 들추어 보는 일만 남았다. 그리하여 그것을 어떻게든 써보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남루하면 남루한대로, 불완전하면 불완전한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