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희의 <유년의 뜰>을 필사하다가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했다.
"그리마의 수많은 발들이 더욱 분주히 어둠을 갉아대고 베개를 베지 않고 자는 우리들은 맹렬히 이를 갈았다."
그 문장의 마지막, "맹렬히 이를 갈았다"는 부분에 이르러서 무언가 알 수 없는 울컥함이 목젖까지 차올랐다. 나는 순간 감전된 듯 호흡을 멈췄고, 몇 초가 흐른 뒤에야 나를 휘감고 있던 정체모를 감정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노랑눈이라고 불리우는 어린 여자아이다. 아버지는 없고, 늙은 할머니와, 밥집에 일을 하러 다니는 어머니, 두 오빠와 한 명의 언니, 그리고 동생. 자신을 포함해 일곱 식구가 비좁은 한 방에서 몸을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노랑눈이. 아마도 나는 한 방에서 일곱 식구가 서로 맹렬히 이를 갈아대며 자는 모습에서 어떤 슬픔을 느꼈던 듯 하다. 그래, 그건 분명 슬픔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슬픔이라고만 하기에는 뭔가 석연찮은… 아, 그 수상한 감정이란….
태어날 곳을 선택하지 못하는 인간의 운명, 그런 삶 속에 내던져진 인간의 고독감과 서글픔,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본능적 몸부림, 어떻게든 살아가라고 강요하는 삶의 모순과 가혹함,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생기는 인간에 대한 연민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이 그 한 문장으로 인해 물밀듯이 내안으로 밀려들어왔다. 한순간에.
그리고 또다른 문장,
"맹렬히 이빨 가는 소리 속에 우리들이 저마다 뱉어내는 땀냄새, 떨어져내리는 살비듬내, 풀썩풀썩 뀌어대는 방귀냄새, 비리고 무구한 정욕의 냄새, 이 모든 살아있는 우리들의 냄새는 음험하게 끓어올랐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동생과 함께 한 방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기 때문일까. 소설 속 그 문장은 문득 내 유년시절을 들여다보게 했고 그것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 문장에 들어있는 어떤 감정의 선과 미묘히 맞닿아서 그러한 감흥을 불러 일으킨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감정과 감정의 맞닿음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이 바로 좋은 소설이 아닐까. 결코 불행하다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읽으면 그 불행이 절절히 느껴지는, 그런 소설.
가끔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유년의 뜰을 서성이고 있는 것일까
나와야 할 길을 잃어버린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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