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편혜영, 『아오이가든』, 문학과지성사, 2005.

시월의숲 2009. 1. 14. 21:05

편혜영의 첫 소설집, <아오이가든>을 지배하는 이미지를 세 가지로 요약한다면 시체, 고양이, 죽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자연히 시체와 연관되기 때문에 결국 같은 이미지가 아니냐고 묻는다면, 나는 다시 냄새, 정확히 말해서 시취라고 말하고 싶다. 소설집에 실린 아홉 편의 소설 속에는 많든 적든 시체들이 나오고, 고양이가 나오며,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집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암울하며, 출구가 없는 감옥에 갇힌 듯 답답하고 어둡다. 단편을 하나씩 읽고 나서 드는 공통적인 생각은, 주인공이 살아 있는 것인지 죽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소설의 처음, 주인공은 살아서 움직이고 말도 하지만 소설의 끝을 읽고 나면 주인공의 움직임과 말과 생각들이 모두 죽은 자의 환상, 환각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강렬하게 든다. 작가는 찬란한 문명의 이면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에 관심이 있는 것일까? 그늘에서 벌레처럼 살아가는 인간들의 죽음같은 삶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살고 있지만, 우리의 일부분은 이미 어딘가에서 죽어버려 시취를 풍기며 썩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돈과 탐욕에 눈이 멀어 자신의 몸에서 풍기는 시체의 냄새를 맡지 못하고, 타인의 시취 또한 맡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시취를 풍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문명의 그늘에서 죽어가듯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결코 그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의 운명을 운명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니다. 그늘을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찬란한 문명과 썩은 인간들이다.

 

편혜영의 소설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시체가 되어 썩어버릴 수 밖에 없는 인간들에 대해 생각했다. 너무 과격한 말이라고? 아니, 편혜영의 소설을 읽고나면 그런 말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그리고 세상은 이미 그런 죽음과 시체의 이미지, 어두운 곳에 숨어 인간들이 먹다 버린 음식물 쓰레기를 뒤지는 고양이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편혜영은 그런 이미지들을 조합해 한 편의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천박하지 않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 모든 예술 작품이 그러하듯, 소설도 쓰레기와 시체들 더미에서도 어떤 미학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아,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