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배수아, 『부주의한 사랑』, 문학동네, 2003.

시월의숲 2008. 11. 17. 14:23

이 소설을 읽고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어떤 줄거리가 아니었다. 배수아가 서술하고 있는 문장 자체에서 오는 모호한 분위기와 정체불명의 시공간, 그 속에서 부유하는 인간들의 관계, 그 부주의한 사랑, 찬 겨울바람에 얼어버린 눈물자국을 바라볼 때의 서늘함과 언제 베였는지 모르게 피가 맺혀 있는 피부의 쓰라림 같은 것. 모든 것이 훅 불며 날아갈 듯한 덧없음.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바로 이렇듯 허허로운 말로 밖에 표현할 길 없는 것들이었다. 그녀의 소설은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라는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읽으면서 보고, 보면서 느끼고, 느낀 다음에는 사라져 버려 꿈같은 감촉의 여운만이 남겨져 있는.

 

주인공인 나는 이모의 딸인 연연과 같은 집에서 자라나고 아버지의 연인이자 자신의 사촌인 연연의 죽음을 경험하고, 자신을 낳아준 모령과 그녀의 삶에 대해 추억하고, 이모이자 어머니인 미령과 그녀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부주의하게 빠져들어 갔던 한 남자아이와 사촌이라고 불렀던 또 다른 남자아이와의 관계. 이 모든 것들은 내가 의도적으로 복잡하게 서술하는 것이 아니다. 소설 안에서 이들의 관계는 선이 아닌 점으로 툭툭 끊겨져 있다. 주인공은. 때로 사촌인 연연의 시점으로, 모령, 혹은 미령의 시점으로 나타난다. 그녀들에게는 모두 이름이 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소설 속 '''연연'이기도 하고 '미령'이기도 하며 '모령'이기도 한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모두 부주의했으며 그리하여 삶은 점차 황폐해져만 갔고 결국은 그로 인해 쓸쓸히 죽어가야만 했다. 모령은 나이가 많은 남자의 아이를 여럿 낳다가 생을 마감해야만 했고, 미령은 나이 어린 물리교사와 결혼했으나 생계 때문에 화가의 길을 포기하고 병에 걸려 생을 마감해야 했으며, 연연은 키워줄 능력이 되지 않는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나와 이모의 집에서 집안 일과 아이들을 돌보다가 초록색 도끼에 찍혀 죽임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나. ''는 어머니가 없는 한 남자아이에게 빠져들었으나 곧 그의 유부남인 사촌에게 빠져들었으며 그 결과 당연하게도 ''는 혼자만의 쓸쓸한 생을 살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나와 연연, 미령과 모령. , 이 얼마나 황량하고 고독한 삶의 풍경인가. 사랑이란, 삶이란 과연 무엇이길래.

 

이 소설은 부주의하게 빠져들 수 밖에수밖에 없는 사랑의 기록이자 어딘가로 스며들지 못하고 부유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의 한 기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쓸쓸하게 우리는 우리의 삶을 마감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우리가 검은 강물처럼 빠져들어 갔던 모든 사랑은 그토록 부주의하다. 철저히 따지고, 계산하고, 계약된 사랑이라 할지라도. 사랑을 따져본다는 것 자체가 부주의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러한 검은 강물에 빠져 보지 못한 사람은 어찌해야 할까.. 나는 이미 너무나 늙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바람이 나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말기를 바라며, 이제는 꿈속에서도 아무것도 알 수가 없고 이제 조용히, 조용히 죽어가기만을 바라'게 되는.